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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도 페미니즘 문학이 있냐고요? 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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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도 페미니즘 문학이 있냐고요? 답은…”

입력
2020.09.08 04: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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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인민들의 문학 생활' 낸 오창은 교수

오창은 교수의 연구실 책장에는 각종 북한 원전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평향종합인쇄공장'에서 제작된 책들로, 소속 대학 학장의 추천사를 받아 통일부 장관의 승인 아래 취득한 것들이다. 배우한 기자

오창은 교수의 연구실 책장에는 각종 북한 원전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평향종합인쇄공장'에서 제작된 책들로, 소속 대학 학장의 추천사를 받아 통일부 장관의 승인 아래 취득한 것들이다. 배우한 기자


1997년, 제 몸만 한 배낭을 등에 진 청년 한 명이 인천항으로 입국했다. 연변을 출발, 대련을 거쳐 온 배였다. 보따리상처럼 뵈지 않는데, 여행자라기에도 짐이 컸다. 앞을 막아선 세관원이 짐을 뒤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가방에서 쏟아진 건 ‘김일성저작집’을 비롯, 온갖 ‘빨간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서울 흑석동 중앙대 연구실에서 만난 북한 문학 연구자 오창은 교수는 '이젠 추억이 된 옛일'을 얘기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석사 시절 교환 연구생으로 중국 연변대에 갔다. 거기서 북한 문학 자료를 닥치는 대로 모았다. 월북작가 한설야(1900~1976), 이기영(1895~1984) 같은 이들을 다루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입국하자마자 붙잡혔다. 험한 취조를 당했다. 연구 목적이라 구속은 면했지만, 가져온 북한 자료는 '전량 몰수, 소각 처분'될 운명이었다. 사정사정해서 통일부 평화문제연구소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전량 압수됐다. 자료가 없으니 결국 석사 논문 주제를 바꿔야 했다.

그 뒤 23년. 햇볕정책에 남북정상회담까지 있었다지만, 어려움은 여전하다. 남북관계나 국제정세에 따라 연구는 부침을 겪는다. 최근 내놓은 ‘친애하는 인민들의 문학 생활’은 이 와중에 가까스로 내놓은 책이다.

오 교수는 이 책에서 북한 유일의 문예잡지 ‘조선문학’에 2010년 이후 발표된 소설들을 분석했다. 보기 드문 '동시대 북한 문학 평론집'인 셈이다.

알려졌다시피, 북한 체제에서 말과 글은 철저한 통제 대상이다. 책은 당의 배급망을 통해 무료로 배급된다. 작가들은 '조선작가동맹' 소속으로 나랏돈을 받으며 글을 쓴다. 그래서 작가 정보 역시 이름 하나 달랑 있을 뿐, 나이나 성별 등은 알 수 없다. '개성적 문학' 자체가 없는 셈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소설은 어차피 일방적 선전 아닐까. 그걸 굳이 분석할 이유가 있을까. 오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작품들을 세세하게 읽어나가다보면, 북한 작가들의 세대교체와 젊은 작가들의 등장을 실감할 수 있다"고도 했다. 오 교수가 36편의 북한 소설을 분석하면서 페미니즘에서부터 비(非)체제까지 읽어내는 이유다.


'친애하는, 인민들의 문학 생활'은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중인 비평가가 대중독자를 대상으로 쓴 최초의 동시대 북한문학 평론집이다. 서해문집 제공

'친애하는, 인민들의 문학 생활'은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중인 비평가가 대중독자를 대상으로 쓴 최초의 동시대 북한문학 평론집이다. 서해문집 제공


북한 문학의 가장 큰 뼈대는 당연히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다. 당의 공식적인 정치적 지향을 거스르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균열이 나타난다. 물론 오 교수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작품이 그렇게 읽힌다는 것과 작가가 그런 복선을 깔고 글을 썼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체제의 특성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알게 모르게 슬슬 삐져나오는 요소가 생긴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렴예성의 ‘사랑하노라’(2018)나 김옥순의 ‘동창생’(2018) 같은 작품을 읽어보면 동시대 여성의 개인적 욕망이 드러나거든요. 물론 큰 틀에선 반성이 강조되지만, 예전 북한 소설에는 여성의 개인적 욕망 자체가 없었어요." 페미니즘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의 단초 같은 것들이 엿보이는 셈이다. “당연히 북한이 좋아하는 작품은 당성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이고, 그런 건 매달 ‘조선문학’ 첫머리에 실려요. 그래서 이 기준에 미달하는 작품들, ‘조선문학’ 뒷부분에 실린 작품이 더 흥미롭죠."


오 교수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항하는 북한 여성의 욕망 표현이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렴예성의 '사랑하노라'(2018)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소범 기자

오 교수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항하는 북한 여성의 욕망 표현이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렴예성의 '사랑하노라'(2018)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소범 기자


가령 작품 자체는 '노력영웅'이란 칭호를 얻는 과정을 다룬다. 그 과정을 읽다보면 북한 민중의 처참한 생활상이 언뜻 드러나는 방식이다. 반(反)체제가 아닌 비(非)체제란 표현도 거기서 나왔다. 북한에 반체제 문학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을 묘사하다보면 체제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이 노출된다. 오 교수는 이걸 "은연 중에 딴 얘기를 하는 방식"이라 불렀다.

소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기에, 의도와 상관없이 현실을 노출시킨다. 제아무리 선전물이라 해도, 그 안에는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있다는 얘기다. 오 교수가 북한 현대 문학을 연구하는 이유다. 그는 "이 책을 두고 친북이냐 반북이냐 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는 오늘날 북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책으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쉬운 점은 하나 있다. 원래 평론집과 함께 36편을 담은 북한 소설집을 동시에 내려 했지만 무산됐다. 저작권 문제 등이 있다지만, 불발된 건 결국 최근의 경색 국면 때문이다. 오 교수는 "소설집까지 내서 빨리 '완성체'를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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