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오랜 만에 모인다. 사업에 실패한 남자가 홀로 사는 아버지의 이층 양옥집으로 딸과 아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얼마 뒤 여동생까지 합류한다. 남편과 갈라서려는 여동생은 친구 집에 몸을 의탁하다 친정에 둥지를 틀려 한다. 오랜 만에 모인 가족이 뜰에서 자란 수박을 먹으며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운다. 불행일까, 행복일까.
가족은 모순덩어리다.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다. 없으면 허전하고 그립고, 있으면 괜한 신경전을 벌이며 밀쳐낸다. 지난달 20일 개봉한 독립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알 듯 모를 듯 복잡다단한 가족의 정서와 면모를 세밀히 그려낸다.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 집에 기거하게 된 어린 남매의 성장통을 통해 가족의 단면을 포착해내는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올해 한국 영화가 거둔 가장 빼어난 성취 중 하나가 될 듯하다.
‘남매의 여름밤’은 윤단비(30)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윤 감독은 대만 양더창(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2000) 같은 작품들을 보며 영화를 향한 꿈을 키웠다. 국민대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공부했다. 아버지는 영화애호가다. 10여 년 전 딸의 진로 선택을 말렸다. “감독은 박찬욱, 봉준호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남매의 여름밤’만 놓고 보면 아버지의 예측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남매의 여름밤’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이어지고 있는 뚜렷한 한 경향을 보여준다. 걸출한 여성 감독들의 릴레이 등장이다. 2016년 윤가은 감독이 ‘우리들’로 인상적인 데뷔식을 치르더니, 지난해 김보라 감독이 ‘벌새’로 여러 영화상을 받았다. ‘두 개의 문’(2012)과 ‘공동정범’(2018) 등을 연출한 김일란 감독은 최근 가장 주목 받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신인 남성 감독을 꼽으라면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여성 감독의 약진이 그만큼 눈부시다.
신진 여성 감독들의 서식지는 독립영화계다.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완성도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장기 아이의 눈으로 가족의 의미를 들여다 보거나(윤가은ㆍ윤단비 감독), 시대의 어두운 공기를 전달한다(김보라ㆍ김일란 감독)는 공통점도 지녔다.
할리우드에서도 요즘 여성 감독 바람이 강하다. 앞으로 선보일 블록버스터 상당수가 여성 감독 차지다. 이달 개봉하는 ‘뮬란’은 뉴질랜드 여성 감독 니키 카로의 솜씨로 빚어졌다. 내달 개봉 예정인 ‘원더 우먼 1984’는 ‘원더 우먼’(2017)에 이어 여성 감독 페티 젠킨스가 연출했다. 배우 마동석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마블 영화 ‘이터널스’는 중국 출신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가 메가폰을 잡았다. ‘캡틴 마블2’는 흑인 여성 감독 니아 다코스타가 맡기로 최근 발표돼 큰 화제가 됐다. 젠킨스 감독이 여성 최초로 블록버스터(‘원더 우먼’)를 연출했다고 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2017년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한국 영화는 어떨까. 여성 영화인들이 제작 등 영화 여러 분야에서 골고루 활동 중이지만, 상업영화에서 여성 감독의 존재감은 유독 약하다. 임순례 감독만이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영화계도 변혁기를 맞고 있다. 새로운 동력이 필요할 때다. 여성 감독들의 재능이 주류 상업영화에서도 꽃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선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