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연설문에 국정 현안에 대한 해법과 방향성이 담겨 있다면 그의 국정 철학 및 대국민 메시지는 백드롭으로 표현된다. '백드롭(backdrop)'은 원래 연극이나 오페라 무대에 설치된 그림 배경막을 뜻하는데, 최근엔 각종 행사장이나 정당의 회의실 등에 설치된 배경 이미지 등을 통칭한다.
대통령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의 시선이 뒷배경에 자연스럽게 머무르는 점에 착안해 특정 문구나 이미지를 배경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만 해도 무대 배경에는 행사 명칭이나 관계 부처명 정도만 게시하는 수준이었으나 이제는 부처 업무보고 같은 회의석상에서도 중점 추진 정책을 상징적인 문구로 정리해 백드롭에 담을 정도다.
특히, 올해 들어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공식 행사 백드롭으로 꽃이 자주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4월 3일 제주에서 열린 제주 4ㆍ3 추념식에서는 대형 동백꽃이, 6월 10일 서울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열린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장에는 장미꽃이 백드롭으로 활용됐다. 4ㆍ3때 희생된 제주도민을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진 동백꽃은 문 대통령의 추념사와 더불어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강렬한 메시지가 됐다. 6ㆍ10항쟁 당시 학생들이 경찰에게 달아준 장미꽃을 소환한 6ㆍ10 항쟁 기념식에선 그로 인해 활짝 피어난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산과 금강산이 백드롭으로 활용됐다. 당시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한 뒤 남한의 북한산 그림을 배경으로 두 손을 맞잡았고, 회담장 내부 벽면엔 북한의 금강산 그림이 자리잡고 있었다. 민정기 작가가 그린 북한산은 역사상 최초로 군사 분계선을 넘은 북한 지도자를 남한의 명산으로 초대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회담장의 백드롭(상팔담에서 본 금강산ㆍ신장식 작)은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을 회담장 안으로 들여 회담 성공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그보다 앞선 그해 2월 10일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들고 방남한 김여정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과 문 대통령의 기념 촬영 장소엔 고(故) 신영복 교수가 쓴 ‘통(通)’자와 이철수 판화가의 한반도 그림이 배경으로 걸렸다. '소통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의미를 담은 이 서화는 당시 청와대가 북측 고위급 대표단 방문에 맞춰 특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꽃이나 그림 외에도 상징성을 지닌 동상, 건물까지도 백드롭으로 활용돼 왔다. 지난해 3ㆍ1절을 앞두고 문 대통령은 사상 최초로 공공기관 청사가 아닌 외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서울 효창동에 있는 백범 김구 기념관을 국무회의 장소로 정한 청와대는 당시 김구 선생의 동상과 태극기를 백드롭으로 활용해 3ㆍ1운동 100주년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극대화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선 초대형 백드롭이 등장했다. 바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최후 항전 장소인 옛 전남도청이다. 5ㆍ18를 상징하는 다양한 문구와 함께 옛 전남도청이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활용되면서 민주화 운동의 의미와 추모 열기를 고조시켰다.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백드롭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25일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당시 문 대통령 내외가 참가국의 정상 내외를 맞이한 장소에 가상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걸린 것이다. 첨단 5G 기술로 우리의 전통 문화를 재현한 이 백드롭은 각국 정상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탁현민 당시 청와대 행사기획 자문위원은 기획 취지에 대해 "에밀레종은 '국태민안'의 상징이다. 아세안 전체 나라의 태평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겼다"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의 국정철학은 의외로 간단한 문구로도 효과적으로 상징된다. 바로 ‘나라답게 정의롭게’라는 여덟 글자의 표어다. 국무회의와 수석ㆍ보좌관회의가 열리는 청와대 여민1관 대회의실(영상회의실) 벽면에 적혀 있는데, 회의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한 2018년 6월 18일 이후 현재까지 변함이 없다.
청와대 참모들과 함께 문 대통령이 직접 문구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회의나 수석ㆍ보좌관 회의는 영상 뉴스와 사진 기사로 자주 보도되면서 해당 백드롭 역시 국민과 친숙하다. 지난해 8월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주문했는데, 당시 결의에 찬 대통령의 표정과 ‘나라답게 정의롭게’라는 문구가 함께 잡힌 사진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장황한 수사보다 촌철살인의 한마디, 화려한 행사보다 상징적인 이미지가 더 큰 반향을 주는 시대다. 이를 간파한 백드롭의 홍수도 예상된다. 잘 기획된 백드롭도 중요하지만, '보여주기 용'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실천으로 이어질 때 대통령의 국정 철학은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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