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하우스호퍼의 지정학 (8.27)
한 국가나 지역의 '운명'을 지리적 상수를 근거로 따지고 내다보는 국제정치학의 한 갈래를 지정학이라고 한다. 어떤 국가와 이웃했는지, 대륙-대양과의 관계는 어떤지 등이 한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적 판단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다. 다만 지정학은 현재를 귀납적으로 정당화하고 미래를 운명론적으로 치장하는 데 부역해온 전례도 많다. 냉전시대의 한국이 동서 구도 위에서 지정학적 가치를 '이데올로기'로 활용했고, 멀게는 19세기 미국이 서부와 태평양 너머를 넘보면서 '신의 섭리'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들이대기도 했다. 이른바 앨프리드 머핸(Alfred Mahan)의 '해양 권력이론'이다. 20세기 초 영국 지정학자 해퍼드 매킨더(Halford Mackinder)는 유라시아 대륙을 '세계의 심장(Heartland)'으로 상정, 심장을 차지하려면 발트해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핵심 지역'을 장악해야 한다며 러시아와의 헤게모니 대립을 설명했다.
'심장' '머리' 같은 지정학의 비유는 한 국가(지역)를 유기체로 상정하는 '국가유기체론'과 관련이 있다. 특정 국가가 생존, 번영하려면 동물의 먹이 생태계처럼 일정 '생활권'을 차지해야 하며, 포식 동물이 살기 위해 사냥하듯 다른 나라를 식민화하는 게 정당화된다.
히틀러의 망상은 독일 민족주의와 게르만 우월주의에서 싹텄지만, 그 망상에 '운명'의 망토를 둘러준 것도 지정학, 특히 제3제국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스승이자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 집필을 도왔다는 설이 있는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 1869.8.27~ 1946.3.13)의 지정학이었다. 그는 독일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이 1900년대 초 주창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 개념과 국가유기체론, 매킨더의 동유럽 팽창주의를 엮어 히틀러의 망상과 독일 민족주의에 기름진 거름을 제공했다. 그는 패전 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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