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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탕질 정치와 분노 피로증

입력
2020.08.2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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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 미네소타주 멘케이토의 공항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면서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멘케이토=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 미네소타주 멘케이토의 공항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면서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멘케이토=AP 뉴시스


농담처럼 얘기한다. "트럼프의 발언이나 (리)트윗 중에서 진짜 기사 가치가 있는 것만 써야 하지 않을까. '아무 말 대잔치'인데도 언론이 주목하고 전문가들이 그럴싸하게 해석하니까 더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거의 매일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해석을 곁들인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여서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이어서다.

트럼프의 언행은 2016년 대선후보가 되는 과정에서부터 기존 정치문법을 깨뜨리는 파격으로 평가받았다. 지금까지 보여진 언행의 상당 부분은 파격 혹은 '트럼프 리스크'라는 다소 점잖은 용어로도 소화불가인 경우가 허다했다. 취임 첫 날 전임자의 정책 성과부터 무너뜨리고, 전 세계를 호령하는 국무ㆍ국방장관을 트윗으로 해고하고, 돈 문제로 동맹국을 압박하는 걸 정치적 성과로 자랑하고, 상대 당 대선후보 수락연설 직전 방송에 출연해 초를 치고.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정당의 검증 능력 상실,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 선출된 지도자의 언론 공격 등을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명백한 신호로 여겼다. 사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당선된 대통령이 그 절차를 '해체'하거나 '개선'으로 포장하면 이는 시종일관 '합법적'이어서 견제와 비판이 기득권 옹호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붕괴한다"는 말이 히틀러 못잖게 트럼프에도 딱 들어 맞는 셈이다.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두 교수는 "역사적으로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가지 규범"을 언급했다.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제도적 권리 행사에 신중함을 유지하는 '제도적 자제'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것도 이들 규범이라고 강조했다. 언뜻 봐도 "영원히 승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상대를 거칠게 밀어붙이고 위법 논란을 감수한 채 행정명령을 남발하는 트럼프와는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이다.

한 가지 유념할 건 이들 연구자가 '역사적으로'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두 가지 규범이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기대한 대목이다. 며칠 전 주요 격전지에서 트럼프가 조 바이든과의 격차를 1%포인트까지 좁혔다는 CNN방송 여론조사 결과가 전해졌다. 트럼프의 분탕질이 미국과 국제사회를 휘몰아쳤지만, 우리 외교가에서도 요즘엔 다시 그의 재선을 점치는 의견이 꽤 나온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이 20일 화상으로 중계된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윌밍턴=AP 뉴시스

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이 20일 화상으로 중계된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윌밍턴=AP 뉴시스


유승우 뉴욕주립대(코틀랜드) 교수는 엊그제 페이스북에 "지금 미국의 중도표밭은 분노 피로증(rage-fatigue)을 겪고 있다"고 썼다. 이유와 근거가 분명한지, 논리적 정합성은 있는지, 도적적 당위에 부합하는지 등과 무관하게 특정 혹은 불특정 상대를 겨냥한 분노와 불만과 불안과 반감을 자양분 삼는 '분탕(焚蕩)의 정치'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백악관의 다음 주인을 예상하기엔 아직 일러 보인다. 다만 정치에 대한 환멸이 분노와 불안으로 옮아간 지 오래이고, 이를 방치하거나 편승할 경우 결국은 분탕의 자양분이 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트럼프는 지난 4년간 이를 잘 보여줬다. 바이든이 분노 피로증에 어떤 '빛그림'을 쏘아낼지 지켜볼 일이다. 이쯤에서 너나 없이 선거 패배가 재앙이자 절망이 된 듯한 우리의 정치는 어떻게 다른지 문득 궁금해진다.

양정대 국제부장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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