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독재 반대해 온 야권 운동가?
크렘린 개입 독살 시도 의혹 커져?
"독살 추정" 부인에도 이송은 거부?
獨ㆍ佛 정상"치료ㆍ망명 돕겠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갑작스럽게 독극물 중독 의심 증상으로 의식 불명에 빠지면서 러시아 당국의 독살 시도 의혹이 커지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서방국들은 치료 지원 등 나발니에 대한 온정을 모으는 한편 사건의 실체 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일(현지시간) 정상회담 직후 연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발니 측에게 병원 치료나 망명, 보호조치 등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는 나발니가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할 준비가 됐다"며 "그가 살아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 정상은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나발니가 갑자기 의식 불명에 빠진 이유를 신속히 밝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는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배후를 밝히는 것"이라며 "조사는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나발니의 대변인 키라 야르미슈는 이날 오전 나발니가 시베리아의 도시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항공편으로 이동하던 중 기내에서 이상 증세를 보이다 의식을 잃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야르미슈는 "해당 항공기는 시베리아의 도시 옴스크에 긴급 착륙했다"며 "우리는 나발니가 톰스크 공항에서 마신 차에 독성 물질이 섞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발니는 옴스크의 한 병원 집중치료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낀 채 치료를 받고 있다. 독일 인권단체가 그를 독일로 옮길 뜻을 밝혔지만 병원은 환자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며 이를 거부한 상태다.
"푸틴이 두려워한 남자"
변호사 출신으로 러시아 정부 고위 인사들의 비리와 부패를 끈질기게 파헤쳐 온 나발니는 크렘린(러시아 대통령실)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수십차례 투옥되면서도 수년간 푸틴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앞장서 비판해 왔다. 푸틴 대통령이 2036년까지 장기집권할 수 있게 길을 연 지난 6월 개헌 국민투표에 대해서는 '쿠데타', '위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부패척결 비전을 앞세워 2018년 대선에 도전하려다 전과로 인한 피선거권 자격 논란 끝에 출마는 좌절됐지만 러시아 기득권층에는 여전히 경계 대상이다. 특히 유튜브 구독자가 400만명에 이르는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영향력이 높은 부패척결 운동가라는 점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위협적인 인물로 꼽힌다.
나발니가 테러에 노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7월에 공정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금된 상태에서 알레르기성 발작을 일으켜 입원한 적이 있다. 당시 주치의는 "알 수 없는 화학물질에 중독됐다"는 소견을 밝혔다.
기시감 드는 크렘린궁의 독살 시도 의혹
러시아 야권을 중심으로 이번 사건이 크렘린이 배후인 독살 시도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러시아에서는 옛 소련 시절부터 수많은 반체제 인사가 독살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유명한 사건으로는 2006년 러시아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 요원 출신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죽음을 들 수 있다. 영국 망명 생활 중 러시아 비평가로 활동하며 푸틴 정권을 비난했던 그는 런던의 한 호텔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사망 원인은 방사성 물질 '폴로늄 210' 중독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FSB의 요원들이 리트비넨코를 살해한 것으로 결론내리고 푸틴 대통령을 배후로 지목했다. 2018년 3월 초에는 영국 솔즈베리에 거주하던 러시아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가 독극물 중독 증세로 쓰러져 입원 치료를 받은 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러시아 재야인사로 '자유러시아재단'의 미국 내 운영자인 블라디미르 카라-무르자는 "독살은 푸틴 정권의 정적을 추적하는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수단"이라고 로이터통신에 밝혔다.
일각에서는 젊은층의 지지도가 매우 높은 나발니를 공격할 경우 역풍이 일 수 있다는 이유로 크렘린이 이번 사건에는 관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정치 전문가인 타티아나 스타노바야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푸틴 대통령이 나발니를 죽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수년 전 크렘린이 나발니 살해를 시위를 촉발할 악몽 같은 시나리오로 여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인터넷 언론 타이가인포는 그의 독살 시도가 크렘린이 아닌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설계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나발니는 내달 1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베리아 도시들을 방문해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의원들의 비리에 관한 자료를 수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크렘린궁 대변인은 "독살은 추정일 뿐"이라며 개입 의혹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로이터통신은 "독일에서 나발니를 태우기 위한 항공기가 옴스크에 도착했는데 병원이 이송을 막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이번 사건은 결국 푸틴 대통령의 통치 체제에 무질서가 싹트고 있는 방증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세바 구니스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트위터에 "푸틴 대통령이 나발니의 독살 시도에 관여했으리라는 추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적이 많은 사람은 언제, 어떻게 독극물 중독에 노출될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또 세르게이 라드첸코 영국 카디프대 교수는 "푸틴 대통령은 야당 인사들이 정기적으로 살해되고 독살되는 나라의 '자칭 통치자'이며, 러시아에 법적인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라며 "따라서 모든 책임은 푸틴 대통령에게 있다"고 트위터에 적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