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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강두' 사태와 신뢰 사회

입력
2020.08.21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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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팀 K리그와 유벤투스 FC의 친선경기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연합뉴스

지난해 7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팀 K리그와 유벤투스 FC의 친선경기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연합뉴스


당연할 거라 믿었던 약속이 아무렇지 않게 깨졌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자칫하면 배신감이 들고,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의심부터 앞선다.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셈이다. 사람 간의 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2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종료 휘슬이 울리자 분통을 터뜨렸다. ‘팀 K리그’와 ‘유벤투스’의 맞대결로 치러진 친선경기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초 ‘호날두 최소 45분 출전 보장’이란 소식에 기꺼이 값비싼 티켓을 구입했던 관객들은 이미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시합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엄청난 규모의 돈이 오가고, 수십, 수백 만의 사람이 관심을 갖는 국제적인 행사였다. 이 시합이 내건 약속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K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과 유벤투스 선수들이 맞대결을 펼치고, 2) 최고 스타인 호날두가 최소 45분간 이상 경기에 출전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약속 모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호날두의 소속팀 유벤투스는 경기 시작 시간까지 경기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유벤투스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거의 1시간 정도가 날아가버렸다. 6만여 관중이 들어찬 경기장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모습이 현장 생중계 방송사를 통해 낱낱이 전파됐다.

유벤투스 구단의 한국 내 일정 자체가 난센스였다. 유벤투스가 요구한 일정은 한국 내 경기 진행이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주관사인 ‘더페스타’가 이걸 받아들였다. 유벤투스는 경기 당일 입국해 경기를 치른 뒤 곧장 이탈리아로 출국하도록 일정이 짜였다. 하지만 촘촘히 짜인 일정도 평일 저녁 서울 시내 교통 체증 앞에 속절없이 어그러졌다. 6만여 관중을 불러 모은 거대한 스포츠 이벤트는 결국 ‘킥오프 시간’이라는 기본적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 채 망가져버렸다. 뒤늦게 시작된 경기에는 호날두도 뛰지 않았다. 당초 약속한 45분간 출전은 언감생심, 호날두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축구화를 신지 않았다. 부상과 팀에 대한 불만 표출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결과적으로 ‘호날두 출전’ 약속을 믿고 시간과 돈을 투자한 팬들이 피해자가 됐다. 팬들은 약속을 저버린 호날두를 이전 별명인 ‘우리 형’이 아닌 ‘날강두’로 불렀다. 주최사인 ‘더페스타’ 측은 티켓 판매를 앞두고 호날두가 직접 “서울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하는 영상을 배포했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호날두 출전이 보장된 경기”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호날두는 경기에 뛰지 않았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약속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수십, 수백만 원의 비용을 고스란히 날린 셈이 된 팬들은 이 경기를 ‘사기’로 단정 짓고 소송을 진행했다. ‘더페스타’와 유벤투스, 호날두는 사기 혐의로 경찰에 고발됐다.

1년여가 흐른 지금, 이 기이한 사기극의 결말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서울수서경찰서는 지난 20일, 13개월 전 열린 ‘팀 K리그’와 ‘유벤투스’의 맞대결 관련 경찰 수사를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탈리아 사법 당국의 수사 협조가 없어 진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청난 수의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당연하리라 믿었던 약속이 깨진 자리에, 배신당한 이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이대로 잊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과연 그래도 좋은 것일까. 배신과 사기가 처벌받지 않는 세상 앞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서형욱 풋볼리스트 대표ㆍ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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