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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결정할 것이다”가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결정해야 한다

입력
2020.08.24 04: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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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독일 통일을 둘러싼 외교의 승패

편집자주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독일 통일은 한명의 여성 정치가를 역사의 뒤안길로 이끌었고 다른 한명의 여성을 정치무대에 올렸다. 두 여성은 모두 하층 출신이었으며 부모의 후광이나 집안의 연줄 없이 정치인이 됐다. 둘은 모두 보수주의 정치가였지만 가부장제에 물든 중년 남성들의 성곽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민족의 어머니니 국모니 하는 여성성과도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각각 11년에서 16년 이상 동안 자국의 총리를 역임해 그 세대 남자 아이들에게 “남자도 총리를 할 수 있을지"를 묻게끔 만들었다.

1980년대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와 16년째 집권 중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머리 모양과 외모의 차이만큼 보수주의 정치의 양극을 보여줬다. 대처는 신자유주의의 기수로 노동자들에게는 노조를, 아이들에겐 무상 우유를 빼앗으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국 사회를 시장과 경쟁으로 채웠다. 메르켈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올렸고 탈핵을 관철했으며 200만명에 달하는 아랍 난민을 받아들였다. 둘은 서로 다른 정책과 권력 행사를 통해 보수주의 정치만이 아니라 여성 정치가 유형의 스펙트럼을 확대했다.

둘의 차이와 의미는 더 많지만 화제를 다시 통일로 돌려 보자. 독일 통일이 아니었다면 메르켈은 정치가로 입신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1991년 통일 독일의 초대 환경부 장관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를 발탁한 이는 헬무트 콜 독일 총리였다. 콜 총리는 동독 출신이자 37살의 젊은 여성을 내각에 올릴 필요가 있었다. 한편 대처 총리는 1989년 가을부터 1990년 초여름까지 독일 통일을 반대하거나 유보하도록 채근했다. 그는 1990년 초부터 이미 국제정치 무대에서 고립된 상태였는데,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잔류를 명분으로 뒤늦게나마 독일 통일 열차에 합승할 수 있었다. 조세 문제를 비롯한 내정 요인도 있었지만 독일 통일 외교와 유럽 통합에서 영국이 고립되고 국제정치에 실패한 것은 ‘철의 여인’ 대처가 1990년 11월 28일 실각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1990년대 마가렛 대처(왼쪽) 총리와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독일연방기록원

1990년대 마가렛 대처(왼쪽) 총리와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독일연방기록원

독일 통일을 논의하는 유럽 정상과 외상들의 회의, 특히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 4대 열강의 주요 정치가 중 가장 완강히 독일 통일을 반대한 인물은 대처였다. 대처는 독일 통일과 관련해서 영국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고립된 상태였다. 더글러스 허드 외무장관을 비롯한 각료들과 참모 및 유럽 정치 자문가들은 모두 대처에게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대처는 독일 통일이 유럽의 세력 균형을 흔들고 소련과 동유럽의 민주화를 방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처는 통일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통합의 주역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유럽 내 동반자가 영국이 아니라 독일이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대처는 콜이 “너무도 독일적"이라 마냥 싫었다. 어린 시절 나치 공군의 폭격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고 유대인이 많이 사는 선거구 출신이었던 터라 대처에게 독일은 항상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국가였다.

1990년 독일의 통일 외교는 서방의 반대와 우려부터 극복해야 했다. 콜 총리는 “그 여자”(콜은 대처를 사석에서 항상 그렇게 불렀다)의 독일 통일 반대를 미국의 지지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의 친교로 극복했다. 서독 정부가 추진한 통일 외교의 전제는 독일 통일을 위한 유럽 안보 및 외교 문제의 해결과 양독 관계의 발전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후자를 통해 콜은 독일인의 자주적 결정권을 부각할 수 있었고, 그것을 지렛대로 통일 독일의 안보동맹 문제를 해결했다. 1990년 2월 24일과 25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콜 총리와 부시 미국 대통령은 통일 독일이 나토 회원국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콜은 이미 1990년 1월 4일 미테랑 대통령을 만나 독일 통일이 유럽 통합을 저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촉진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두 과제의 동시 달성을 주장했던 미테랑은 유럽 통합의 과제에 통일 독일이 프랑스와 협력할 것을 전제하면서 ‘선 독일 통일 후 유럽 통합’을 수용했다.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4 회담 당시 모습.출처 독일연방기록원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4 회담 당시 모습.출처 독일연방기록원

그렇지만 소련의 안보 입장을 고려해야 했고 여타 주변국의 우려, 다시 '제4제국'이 등장해 유럽을 제 휘하에 두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달래야 했다. 서독 정부는 통일 독일이 서방과의 군사동맹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 주변국의 우려를 해소하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1990년 2월 14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 소속의 23개국 대표 회의는 독일 통일의 외교적 문제를 논의할 기본 틀로 ‘2 플러스 4’ 회담을 결정했다. ‘평화협정’을 통한 외교 안보 해결책은 종전 45년이 지난 시점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6자 회담’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4대 열강이 독일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해서였지만, ‘4플러스 2’가 아닌 이유는 서독과 동독의 결정권이 우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독일 통일의 마지막 장벽은 소련이었다. 그런데 이미 모스크바의 소련 정치 지도부는 1월 25일 자체 회합에서 독일 통일이 역사의 도정에 들어섰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어떤 다른 대안도 따로 마련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역사가 결정할 것이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하여 1990년 2월 10일 콜 총리는 소련 공식 방문에서 고르바초프로부터 '통일의 과정과 시기에 대한 독일인들의 자주적 결정을 존중할 것'이라는 확인을 얻어냈다. 사실상 외교ㆍ안보 정책 면에서 보면 독일 통일의 결정적 계기는 1990년 2월 10일 고르바초프가 “독일인들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었다. 모스크바 방문을 마치고 서독 본으로 돌아온 뒤 콜의 핵심 참모인 호르스트 텔칙은 “통일의 열쇠는 이제 더 이상 모스크바에 있지 않다. 연방총리가 그것을 가져왔다. 얼마나 빨리 통일이 이루어질지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으스댔다.

물론 1990년대 전반기 내내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더 정확히는 뒤늦게) 독일 중립화 내지 중부 유럽 지역에서의 소련과 미국 군대의 동시 철수 등을 독일 통일과 연계시키고자 했다. 소련과 서독 정치 지도부는 5월 말까지도 통일 독일이 나토 회원국에 속할지 여부를 놓고 씨름을 벌였다. 콜 정부가 고르바초프에게 이미 1990년 초에 막대한 생필품 지원을 약속했고 즉각 이를 이행했기에 우려와는 달리 협상이 수월했다. 서독이 돈으로 소련에게 통일을 샀다고 말하는 이유다.

결국 1990년 4월 28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유럽공동체 특별정상회의는 유럽 통합의 맥락 속에서 독일 통일의 지지에 합의했고 이를 선언했다. 5월 5일 본에서 열린 제1차 2+4 회담에선 통일 독일의 국경선 문제, 유럽안보구조 개혁, 베를린 문제, 4대 전승국과 독일의 최종 관계의 국제법 문제 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6월 22일 2차 회의에서 소련은 평화협정이 아니라 국제법적 규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합의했다. 7월 16일 2+4 회담 3차 회의에는 폴란드가 참여해서 오더-나이세 국경문제를 매듭지었고, 동독 주재 소련군의 철수 비용과 군대 규모 등의 문제를 해결했다.

1990년 7월 16일 캅카스에서 만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가운데)와 콜 총리. 출처 독일연방기록원

1990년 7월 16일 캅카스에서 만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가운데)와 콜 총리. 출처 독일연방기록원

1990년 7월 16일 소련 캅카스 휴양지에서 고르바초프는 콜 총리와 서독 정치인들을 불렀다. 그는 독일이 통일로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그런 한 독일의 나토 잔류를 승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독 정치가들이 “역사를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고르바초프는 서독 지도부의 예상을 뛰어넘어 서독군이 동독 지역에 주둔해도 좋다는 말까지 했다. 소련군이 철수한 뒤 통일 독일의 군대가 나토에 잔류하는 데도 동의했다. 군대 규모는 서독이 제시한 37만명을 받아들였다. 콜은 이에 대해 50억 마르크(31억 달러)에 이르는 차관 제공을 약속했다.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4 회담 4차 회의에선 ‘독일 문제의 최종 결정에 관한 조약’인 ‘2+4 조약’이 체결됐다. 조약 7조의 규정으로 독일은 국내외의 모든 문제에서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다. 11월 9일 통일 독일은 소련과 우호, 선린,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콜의 외교 성공이었다.

사실 독일 통일을 위한 국제정세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국제 냉전은 균열이 뚜렷했지만 열강과 주변국은 고유의 이익과 전망에 따라 방해와 개입을 당연시했다. 하지만 상황을 개선하려는 역사 행위자들의 정확한 관찰과 탐색, 신중하거나 단호한 행동과 결정들의 연쇄가 더 중요했다. 서독 정치가들은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 등의 강대국들이 독일 통일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를 정밀히 관찰했고 조금씩 행동 반경을 넓히고 자기결정권을 높였다. 한반도 주변 열강들의 전략과 입장을 상수로 보고 한반도 주민들의 행위 여지와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제약하는 모든 단견과 전망 부재의 태도는 역사의 하수구로 버릴 때다. 새로운 접근만이 새로운 역사를 연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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