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황교안 전 대표 방문 때와 다른 차분한 분위기
“너무 늦게 찾아왔다. 벌써 100번 사과하고 반성했어야 마땅한데, 이제야 그 첫걸음을 뗐다.”
19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광주 5ㆍ18 민주묘지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5ㆍ18 민주 영령과 광주 시민 앞에 이렇게 용서를 구한다”며 “부끄럽고, 부끄럽고,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올해 80세인 그는 미리 준비해 온 사과문을 읽으며 복받친 듯 눈물을 글썽였다. 무릎을 꿇었다 일어설 때는 잠시 휘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릎 꿇는 사과’는 김 위원장 본인의 의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아픔에 대한 너무 늦은 사과를, 말로만 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는 전언이다.
김 위원장이 광주를 찾은 것은 지난 6월 1일 취임 후 처음이다. 이날 가장 먼저 5ㆍ18 민주묘지로 향한 그는 방명록에 “5ㆍ18 민주화 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5ㆍ18 정신 계승을 부정하던 일부 극우 세력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시발점이란 점을 분명한 것이었다.
김 위원장은 이어 '민주의 문' 앞에서 사과문을 낭독했다. 그는 “1980년 5월17일 저는 대학 연구소에서 밀려있는 강의 준비에 열중했다. 광주 희생자 발생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알았다”고 본인의 얘기로 운을 뗐다. 이어 “알고도 침묵하고 눈감은 행위의 소극성 역시 작지 않은 잘못이다"라며 "역사의 법정에서는 이것도 유죄”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과거 신군부가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재무분과 위원으로 참여했던 것에 대해 “그동안 여러 번 용서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심에 빠진 광주시민과 군사정권에 반대한 국민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며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자신의 원죄를 먼저 고백한 김 위원장은 지난해 일부 당 소속 인사가 5ㆍ18 유공자를 ‘괴물 집단’ 등으로 비유해 막말 논란을 빚은 데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광주에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그것을 부정하고 5월 정신을 훼손하는 일부 사람들의 어긋난 발언과 행동에 저희 당이 엄중한 회초리를 들지 못했다”며 “그동안 잘못된 언행에 당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진실한 사죄를 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 화해는 가해자의 통렬한 반성과 고백을 통해 이상적으로 완성될 수 있지만, 권력자의 진심 어린 성찰을 마냥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가 대표해서 이렇게 무릎을 꿇는다”고 말했다. 이어 “제 미약한 발걸음이 역사의 매듭을 풀고,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끝을 맺었다.
보수정당 대표가 5ㆍ18민주화운동 추모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김 위원장은 행방불명자 묘역에서도 최초로 묵념하고 헌화를 했다.
김 위원장의 진정성 담긴 사과에 이날 광주 분위기는 지난해 5ㆍ18 기념식 때 황교안 전 대표가 찾았을 때와 확연히 달랐다. 항의하는 시민들의 육탄방어도, 고성과 욕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날 5ㆍ18 민주화운동의 흔적이 남은 옛 전남도청을 찾은 김 위원장을 향해 한 광주시민은 “작년까지만 해도 당대표가 왔을 때 연세드신 분들이 죽기 살기로 막았다. 왜냐면 진실성이 안 보여서”라며 5ㆍ18 폄훼 같은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 당부했다. 김 위원장은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두고 당 내부에서는 “김 위원장이 취임 후 거듭해서 발신한 호남 구애 메시지가 광주 시민들에게도 전달된 것 같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통합당은 앞으로 5ㆍ18 유공자 예우를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하는 한편 호남 지역 시도당 예산에 선거반환금 일부 할당하거나, 현역 의원들에게 호남 지역구를 배정하는 등 정책적으로도 ‘호남 보듬기’에 주력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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