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오만(Oman) 남부 ‘살랄라’로 가는 길
영화 속 한 장면인가? 눈을 자주 질끈 감았고 소맷자락으로 바람을 막았다. 오만 남부로 달렸다. 목적지는 투박한 장화 모양인 아라비아반도의 발끝, 인도양에 접한 ‘살랄라(Salalah)’다. 작년 이맘때쯤의 그곳은 뜨겁고, 습하고, 태어나 처음 만난 풍경이 있었다.
여행이 장기간 계속되면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가 온다. 나를 찾고자, 혹은 지난 나를 잊고자 한 ‘나’가 사라지는 증세다. 기이하다. 그저 길이 있기에, 비행기 티켓을 끊었기에 갈 뿐, 나의 존재는 마모되고 잊혀진다. 무스카트로부터 사선을 그리며 살랄라로 향하는 약 1,000km의 길. 낮은 어느덧 밤이 되고, 모래바람은 앞차의 뒷모습을 삼킨 채 아스팔트에 카펫을 만들다 지운다. 모든 것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기분이다. 1년여 장기간 여행의 초반임에도 멀고 아득했다. 마치 나 자신도 저 모래알처럼 사라지리라 여겨질 만큼.
달리는 길 위에서 오만 여행을 예습했다. 한국의 약 3배 크기인 오만은 11개 주로 나뉜다. 살랄라가 주도인 도파르(Dhofar)주는 오만에서 가장 거대한 남부의 발뒤꿈치다. 프랑킨센스(Frankincense) 나무는 지역의 특산품이자 가히 만병통치약이다. 면역력 강화, 진통 치유, 미용 등의 효과로 인해 도파르주를 고대부터 알아주는 수출기지로 세운 공신이다.
시각적으로는 모래가 독차지한 땅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강풍에 허리는 꺾이고 잎은 말랐을지언정, 프랑킨센스 나무는 푸르름을 유지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반전 생명력이 싹튼다. 바스락거리는 몸통에서 축축한 연노랑 젖물이 꿈틀댄다.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프랑킨센스의 존재감이다. 무스카트와 살랄라를 잇는 31번 국도엔 모래가 일군 봉우리와 120km 속도 제한 표지판이 무료하게 이어진다. 방해꾼이 있다면 일렬로 늘어선 새하얀 대형 주택 혹은 낙타뿐이다. 프랑킨센스 나무가 펼쳐진다는 것은 곧 도파르주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준비운동 겸 도파르 산을 맘이 내키는 대로 둘러보기로 했다. 포장 도로가 한정돼 있기에 여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살랄라시에서 서쪽, 예멘과의 국경으로 향했다. 잘 깔린 아스팔트 길 좌측으로 샛길이 여러 갈래 이어진다. 샛길은 곧 해변으로 향하는 비포장도로다. 어디든 ‘꼬불꼬불’하고 ‘울렁울렁’거린다. 자연은 정직하고 새침하다. 편한 길에선 평범한 풍경을, 불편한 길에선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풍광을 선물한다. 파자야(Fazaya)로 진입하는 고생길로 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까딱하면 생사가 불투명할 낭떠러지 길을 더듬거리며 내려갔다.
성난 바람이 몰아온 파도가 새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일말의 희망이던 야외 캠핑장은 버려져 있다. 인생 뭐 있나. 오토캠핑의 첫 야영지로 정했다. 바닷가 앞 야외 취침이다. 텐트를 치고 모래로 양념된(?) 파스타를 삼키듯 먹었다. 눈을 붙인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텐트를 뚫을 기세로 장대비가 내렸다. 생사가 갈리는 순간, 우리의 몸놀림은 전투병처럼 민첩해졌다. 날벌레와 함께 차 안으로 긴급 대피한 것까진 좋았으나 습기와 싸움하며 밤을 지샜다.
다음날 해는 어김없이 떴고, 바다도 그 자리다. 그런데 우리의 텐트는 어디로 갔을까. 흔적 하나 없다. 꿈인가, 생시인가. 존재 이유가 불투명한 수도꼭지를 발견해 고양이 세수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낙타가 협곡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장면이 눈앞에서 상영된다. 때론 공중 착지한 것처럼 암벽 한가운데에 붙박이 상태다. 이건 뭐지? 그동안 볼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자부해왔는데, 이건 생전 처음 보는 흥미롭고 도전적 풍경이었다.
파자야에서 이어지는 해안도로가 끊겨 다시 포장도로를 향해 올랐다. 예멘 국경과 가까운 달쿠트(Dalkut)란 지역이다. 길은 내비게이션만 봐도 현기증 나는 지글지글 원형 루트다. 수만 년의 시간을 품은 협곡이 이어지고, 거친 곡선 드라이브가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맑고 낮은 계단식 폭포가 위안을 주더니 낙타에 이어 소 떼가 통행을 막고, 물을 잔뜩 빨아들인 나무가 무성하다. 먼 발치의 검은 협곡은 구름 연기를 뿜어댔다.
예멘 국경에서 우회해 살랄라로 되돌아가는 길을 잡았다. 낙타 대신 다시 인간에 의한 교통체증이 빚어지는 곳, 알무그사일(Al Mughsayl) 바닷가다. 마니프(Marneef) 동굴로 유명한 곳이다.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을 든 고사리손의 뒤를 따라가니, 블로홀(blowholes)의 환희와 만났다. 몰아치는 파도가 암벽 틈 사이로 높은 물기둥을 뿜는 분수공이다. 오만의 소년, 소녀는 용감하다. 물기둥이 솟구치는 지점에서 지르는 고함이 파도 소리를 능가했다.
앉은 곳이 명당이라는 듯 허허벌판에 카펫을 깔고 신이 난 현지인들, 낭떠러지에 서 있는 낙타 무리, 안개의 여신이 점령한 위태로운 도로, 바람이 조각한 협곡의 생채기. 오만 여행은 뭐랄까, 아무리 애써도 잡히지 않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대체 우리의 텐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 같다. 그래도 계속 나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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