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분광학과 광기술 분야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인 고재현 한림대 나노융합스쿨 교수가 일상 생활의 다양한 현상과 과학계의 최신 발견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알기 쉽게 조망합니다
21세기 들어 높은 기술력으로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도해 온 국내 기업들이 최근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생산의 중단을 선언했다. 기술적 우위가 사라진 LCD 패널 분야에서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이 기업들은 대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나 양자점(Quantum Dot) 등 기술적 우위를 가진 분야에 역량을 집중, 신기술 개발을 통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 한 기업은 양자점에 기반한 새로운 디스플레이 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양자점이 차세대 기술의 핵심 소재로 부각된 이유를 양자점의 물리와 함께 살펴보자.
양자점 속 나노 세계를 들여다보다
양자점은 수~수십 나노미터(㎚) 크기를 가진 구형 반도체다. 1㎚는 10억분의 1미터로서 원자처럼 작은 세계를 설명할 때 사용된다. 가령 10㎚ 지름의 양자점 일만 개를 늘어놓아야 겨우 머리카락 굵기 정도다.
양자점은 주로 외부에서 받은 에너지를 빛으로 바꾸는 발광 물질로 활용된다. 양자점의 발광 과정에선 내부의 전자가 주도적 역할을 한다. 20세기에 정립된 현대물리학에 의하면 원자를 포함한 물질 속 전자들은 임의의 에너지를 다 가질 수 없으며 양자역학에 의해 허용된 특정 에너지 값들만 가진다. 불연속적인 에너지 상태들 중 하나를 점유한 전자가 외부 에너지를 받으면 에너지가 높은 허용된 상태들 중 하나로 올라간다. 그후 다시 낮은 에너지 상태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전자는 자신이 품었던 에너지를 빛의 형태로 방출한다.
적외선, 자외선, 엑스선 등과 함께 전자기파를 구성하는 빛, 즉 가시광선은 음파나 물결파처럼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 물결이 한번 출렁이며 나아가는 거리를 파장이라 하는데, 파동의 일종인 빛도 파장을 가지며 그 길이에 따라 분류된다. 무지개 색깔의 빛 중 빨강 빛은 파장이 가장 길고 빨주노초파남보의 순서로 파장이 짧아진다. 빛 에너지는 빛알(광자)이라 불리는 작은 덩어리 단위로 전달되는데 빛알의 에너지는 파장이 짧아짐에 따라 증가한다. 따라서 전자가 상태를 바꾸며 내놓는 에너지 값이 클수록 방출되는 빛의 파장이 짧아진다.
양자점의 가장 큰 특징은 크기에 따라 전자가 방출하는 에너지의 양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양자점이 작아지면 전자가 내놓는 에너지가 커지면서 더 짧은 파장의 빛이 나온다. 가령 카드뮴(Cd)과 셀레늄(Se)이 결합한 CdSe라는 대표적인 양자점은 7㎚의 지름에선 파장이 긴 붉은색 빛을 내지만 2㎚로 지름이 줄면 파장도 짧아져서 청록색 빛을 방출한다.
이런 특성은 양자점을 발광 재료로 활용하는 디스플레이의 입장에선 대단히 매력적인 장점이다. 기존의 발광 소재에서는 재료를 이루는 원자의 종류와 성분비를 바꿔서 빛의 색상을 조절했다. 그런데 양자점의 경우엔 조성을 변경할 필요 없이 크기만 바꿔서 발광색을 결정할 수 있다. 단일 조성의 양자점의 크기만 조절해 사람이 볼 수 있는 다양한 색상을 모두 연출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특성인가!
디스플레이의 양자점 활용법
디스플레이는 빛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는 전자 소자다. 그 화면은 화소(픽셀)라 불리는 기본 단위를 모자이크 식으로 촘촘히 배열해 구성된다. 카드 섹션을 든 군중들이 형형색색의 카드로 아름다운 그림을 연출하듯, 디스플레이도 화소별로 밝기와 색상을 변화시켜 총천연색 영상을 구현한다. 따라서 화소별로 빛의 밝기 및 색상을 조절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화소는 다시 빨강, 녹색, 파랑 등 빛의 삼원색을 내보내는 세 종류의 부화소로 구성되고, 이 세 빛을 섞어서 색상을 조정한다. 가령 세 부화소 중 빨강과 녹색 부화소만 켜면 해당 화소는 두 빛이 섞인 노란색으로 보인다.
디스플레이는 화소에서 직접 빛이 형성되는 자발광 디스플레이와 후면에서 공급되는 빛의 도움으로 영상을 구현하는 비자발광 디스플레이로 구분한다. 국내 기업들이 철수를 결정한 LCD 패널은 비자발광 디스플레이에 속한다. 반면에 한국이 기술적 우위를 가진 OLED는 자발광 디스플레이의 대표적 예다.
LCD는 패널 뒤에 위치한 백라이트라는 조명 장치가 공급하는 백색광을 이용해 영상을 구현한다. LCD의 각 화소는 빛의 통과를 조절하는 광스위치 역할을 한다. 백라이트가 보내는 빛을 수돗물에 비유하면, LCD의 화소는 물의 흐름을 통제하는 수도꼭지에 해당하고 그 역할은 LCD 패널 속 액정이란 물질이 담당한다. 부화소별로 통과되는 백색광에 최종적으로 색을 입히는 역할은 어릴 때 손전등의 빛의 색깔을 바꿀 때 가지고 놀던 셀로판지와 비슷한 특성의 컬러필터가 담당한다.
LCD TV의 종류에는 LED TV와 QLED TV가 있다. 일반 조명에도 사용되는 백색 발광다이오드(LED)를 백라이트용 광원으로 사용한 경우가 LED TV다. 반면에 청색광을 내는 LED로 꾸민 백라이트 위에 빨강과 녹색 빛을 내는 두 양자점이 들어간 필름을 올리면 QLED TV용 백라이트가 구현된다. 청색 LED의 푸른 빛이 양자점들에 흡수된 후 빨강과 녹색 빛으로 변해 삼원색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섞여 백색광이 된다.
양자점이 방출하는 빛의 색깔은 순도가 높다. 미술로 비유하면 색상의 채도가 높아 매우 선명한 색에 해당한다. 신선한 재료들로 맛이 풍부한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보다 순도가 높은 삼원색 빛을 섞어 영상을 만들면 디스플레이가 구현하는 색상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즉 가을철 단풍의 진홍색이나 남태평양 에메랄드 빛 바다색을 화면 상에 훨씬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양자점은 LCD의 색상을 다채롭게 만들어 화질을 향상시킨 일등공신이다.
다음으로 자발광 디스플레이인 OLED를 간략히 살펴보자. OLED는 유기 반도체를 활용한 발광 소자로서 부화소를 구성하는 유기 물질에 전류가 흐르면 전기 에너지가 빛으로 바뀐다. 유기 물질의 종류에 따라 방출되는 빛의 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삼원색 빛을 내는 세 종류의 유기 물질로 부화소를 꾸민다. 각 부화소에 흐르는 전류를 이용해 세 빛의 밝기를 조절, 화소의 색상을 결정한다. 하나 이 기술은 대면적에 적용하기 힘들어 주로 중소형 디스플레이에 사용된다. TV처럼 큰 화면의 경우 백색을 내는 OLED 위에 화소별로 컬러필터를 활용해 색을 입힌다. OLED는 풍부한 색감과 더불어 접거나 돌돌 마는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이 가능해 지금껏 접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디스플레이 삼국지는 가능할까
그렇다면 현재 개발 중인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은 무엇일까? 기존의 QLED TV 속 양자점은 청색광을 흡수해 다른 색의 빛을 내는 보조적인 발광 재료다. 반면에 개발 중인 디스플레이에선 넓은 면적의 청색 OLED가 먼저 깔리고 그 위에 양자점이 포함된 부화소가 형성된다. OLED가 내는 청색 빛은 한 부화소를 통해선 그대로 통과되지만 그 옆의 적색 및 녹색 양자점이 배치된 부화소를 자극해서 각각 빨강과 녹색 빛을 방출시키며 삼원색 빛을 형성한다. 이런 면에서 현재 개발 중인 디스플레이는 OLED와 양자점 기술을 융합한 하이브리드 기술인 셈이다.
LCD와 OLED가 지배하는 기존의 디스플레이 생태계에 출사표를 던진 차세대 디스플레이는 초고화질과 8K 해상도가 지배할 대면적 프리미엄 디스플레이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특히 한국이 기술적 강세를 보이는 두 분야의 기술적 융합이 새로운 방식의 디스플레이를 탄생시켜 디스플레이의 삼국지 시대를 열지 세계적 관심이 크다.
중세의 건축물을 아름답게 장식한 스테인드 글라스 속에는 수십 ㎚의 금속 양자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크기에 따라 빛의 특정 파장과 반응해 흡수하는 금속 입자 덕분에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운 색상이 구현될 수 있었다. 오늘날 나노 반도체로 구성된 양자점은 디스플레이 화면에 펼쳐지는 현란한 빛의 공연을 지휘하는 주연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물체색을 자연스럽게 연출하는 자연광 조명이나 식물 생장용 특수 조명, 그리고 질병을 진단하는 생체 의학 분야에서도 양자점은 광범위하게 연구되며 응용되고 있다. 나노의 세계에 갇힌 원자들이 펼치는 빛의 마술이 디스플레이 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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