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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듯 깊은 인상을 남기는 가족영화 '남매의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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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듯 깊은 인상을 남기는 가족영화 '남매의 여름밤'

입력
2020.08.19 04:30
수정
2020.08.19 15:43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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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매의 여름밤' 중 한 장면. 오누필름 제공

영화 '남매의 여름밤' 중 한 장면. 오누필름 제공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뛰어난 연출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극적인 묘사나 설정 없이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영화, 특별한 사건 하나 등장하지 않지만 계속 시선을 잡아 끄는 영화는 매년 수백편이 쏟아지는 극장가에서도 찾기 쉽지 않은 모래 속 진주다. 20일 개봉하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영화의 중심 플롯은 심심하기 짝이 없다. 사춘기 소녀 옥주와 개구쟁이 동주 남매는 아빠와 함께 재개발을 앞둔 동네의 반지하 집을 떠나 할아버지 홀로 사는 2층 양옥집으로 들어간다. 잠시 친구집에 머물던 고모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짐을 싸 들고 온다.

즐겁지 않은 이유로 별 수 없이 함께 지내게 된 가족은 비빔국수를 나눠먹고 할아버지의 생일을 기념해 케이크를 자르며 일상을 공유한다. 심심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이들에겐 각자의 고민거리와 나름의 '사건'이 있다. 승합차에 운동화를 싣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아빠는 남매를 어떻게 부양할지 걱정이고, 고모는 이혼을 생각 중이다. 옥주는 연락이 뜸한 남자친구 때문에 고민인데, 가족을 떠난 엄마를 만나려는 동주는 누나의 반대가 신경 쓰인다.

특정 인물의 시점에 따라 전개되는 영화는 아니지만 작품의 주된 감정은 옥주의 시선에 따라 흘러간다. 옥주는 엄마를 만난 뒤 선물을 잔뜩 들고 온 동주와 싸우는 등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감정의 파도와 담담하게 부딪히기도 하며 삶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이 같은 감정의 흐름과 이를 통한 성장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진짜 사건이다. 친구가 들려주는 내밀한 가족 이야기에 공감하듯, 영화 속 인물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더라도 공감하며 볼 수 있는 건 이런 특징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시민평론가상 등 4관왕을 기록한 이 영화는 신예 윤단비(30) 감독의 첫 장편이다.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 ‘벌새’의 김보라 감독 등에 이어 윤 감독은 이 영화로 독립영화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윤단비 감독은 “소수의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며 웃었다.

첫 장편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연출한 윤단비 감독. 오누필름 제공

첫 장편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연출한 윤단비 감독. 오누필름 제공


일본 거장 감독 오즈 야스지로와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인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을 보며 영화감독을 꿈꿨다는 그는 “장르적이거나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보다 일상적이면서도 친구처럼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매의 여름밤’의 장점은 흔하디 흔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비현실적으로 착한 가족도 아니고, 서로 할퀴면서 괴롭히는 가족도 아닌 평범한 가족. 윤 감독은 “기존 한국영화에 나오는 가족들은 영화적 세계에서 사는 가족처럼 느껴져 옆집 가족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 게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듣긴 하지만 “감정적인 측면에선 맞는 말이지만 구체적 경험으로 치면 10%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별다른 사건 없이 정적인 흐름을 보이는데도 영화는 때로 의외의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옥주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병풍처럼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이야기와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기 때문이다. 윤 감독은 “미성숙한 어른들도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가족을 보는 듯한 착각을 안기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옥주를 연기한 최정운의 섬세한 연기를 비롯해 동주 역을 맡은 박승준, 아빠와 고모로 등장한 양흥주, 박현영의 뛰어난 앙상블 연기는 작품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오래된 2층 양옥집과 여름날의 다양한 빛이다. 감독은 두 달에 걸친 탐색 끝에 실제로 노부부가 사는 인천 소재 주택을 빌려 집안 곳곳에 담은 세월의 흔적을 담아냈다. 윤 감독은 양옥집의 풍성한 정원 등을 반영해 시나리오를 고치기도 했다. 시간대별로 바뀌는 여름날 햇빛의 다채로운 색감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작품의 질감을 두툼하게 만든다.

코로나19로 해외의 여러 국제영화제들이 취소되거나 축소됐지만 ‘남매의 여름밤’에 대한 관심은 이어지고 있다. 올 초 로테르담국제영화는 이 영화에 밝은미래상을 안겼고, 오는 28일부터 열리는 뉴욕아시안영화제는 경쟁부문에 초청했다. 윤 감독은 “완성하고 나니 영화가 스스로 자기 길을 알아서 가는 것 같다”며 웃었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중 한 장면. 오누필름 제공

영화 '남매의 여름밤' 중 한 장면. 오누필름 제공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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