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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담병(紙上談兵)의 전성시대

입력
2020.08.17 16:00
수정
2020.08.17 16:35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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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박성진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전국시대 조(趙)나라 혜문왕 29년(BC 270), 진(秦)나라가 조나라 땅을 포위했다. 당시 제후국이 진나라와 싸워서 승리하는 일은 드물었으나 조나라는 병법가 조사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조사에게는 조괄(趙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총명하여 아버지가 지은 병법서를 줄줄 외웠다. 이론으로는 조사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칭찬하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묻자 조사가 답했다.

조사가 말했다. “전쟁은 사람이 죽는 자리요(兵死地). 그런데 괄은 너무 쉽게 말을 하오. 조나라가 괄을 장수로 삼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저 아이를 장수로 삼는다면 조나라는 무너질 거요.” 한마디로 자기 아들은 ‘지상담병(紙上談兵)’, 탁상공론만 능하다는 말이었다.

시간이 흘러, 조나라 효성왕 7년(BC 260), 조나라와 진나라가 장평(長平)땅에서 다시 대치했다. 이때 조나라를 지탱하던 세 명의 인재 가운데 조사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藺相如)는 생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조나라는 마지막 버팀목인 명장 염파(廉頗)를 내보내 진나라와 싸우게 했다. 진나라가 몇 차례 조나라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조나라는 보루를 단단히 쌓고 싸우지 않았다.

원래 효성왕은 조급하고 식견이 없는 인물이었다. 빨리 성과를 내라고 닦달했지만 염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나라는 염파가 장수로 있는 한 승리하기 어렵다고 보고 이간책을 쓰기로 했다. 진나라는 첩자를 써서 조나라 임금 귀에 이런 말이 들어가게 했다. “진나라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조사의 아들 조괄이 장수가 되는 일이다. 염파는 상대하기 쉬우니 결국 진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이미 군사를 많이 잃고 수차례 패했는데도 수비만 한 채 나가 싸우지 않는 염파에게 화가 나 있던 효성왕은 진나라의 이간질에 바로 장수를 조괄로 교체하고 진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이 의향을 타진하니 조괄은 호언장담하며 자신만 믿으라고 했다. 젊은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인상여가 말렸다.

“조괄의 명성은 과장된 것입니다. 기러기발을 아교로 고정하고 거문고를 타는 것처럼 조괄은 그 부친의 책만 읽었을 뿐 임기응변을 모릅니다.” 여기서 ‘교주고슬(膠柱鼓瑟)’, ‘임기응변(臨機應變)’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그러나 효성왕은 기어이 조괄을 장수로 삼았다. 이때, 그 어머니가 임금에게 아들을 절대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제 남편 조사가 장군이었을 때, 그가 직접 먹이고 마시게 하며 대접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친구는 수백 명이었습니다. 임금과 조정에서 상을 받으면 모두 군대의 수하들에게 나눠 주었고, 장수에 임명된 날부터는 집안일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괄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자 서쪽에 앉아 조회를 받는데 장교들이 감히 그를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왕께서 내리신 돈이며 옷감은 집에다 쌓아 놓고, 날마다 싸고 좋은 땅과 집이 없는지 보고는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그 아비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비와 아들의 마음가짐이 판이하니 왕께서는 제발 장수로 삼지 마십시오.”

고집불통 왕은 이미 결정했다며 거절했다.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일을 망치더라도 집안을 연루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조괄은 염파를 대신한 후, 규정을 모두 바꾸고 장교들까지 교체했다. 조괄이 공격에 나서자 진나라는 짐짓 패하여 달아나는 척했다. 결국 조나라의 군대는 둘로 나누어지고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 46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한 조나라의 군사들은 몰래 서로를 죽여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괄은 죽고 조나라 군사 40만명은 투항했다. 진나라는 그들을 모두 생매장하고 나이 어린 240명만 남겨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전국시대 가장 잔인했던 장평전쟁이다. 이때부터 조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참, 효성왕은 자신이 한 약속 때문에 조괄 집안을 문책할 수가 없었다. 생때같은 남의 집 자식들만 죽인 셈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새삼스레 조괄의 고사에서 기시감을 느끼는 이유는, 근자에 ‘지상담병’을 밑천으로 벼슬도 낚아채고 제 잇속도 귀신같이 챙기는 위인들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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