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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의 도전 직면한 지식인...충고 대신 설득해야

입력
2020.08.18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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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지식인

편집자주

2020년대 지구적 사회 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매주 화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지식인이란 지식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교육을 자기 직업으로 삼는 이들을 말한다. 교수, 교사, 과학자, 언론인, 법률가, 예술가를 먼저 떠올릴 수 있다. 현대사회가 지식사회인 한, 지식을 담당하는 지식인의 역할은 앞선 시대보다 컸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 지식인의 위상이 적잖이 변화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20세기 지식인론의 회고

지식인에 대한 담론은 지난 20세기 서구사회에서 꾸준히 펼쳐졌다. 주요 쟁점은 두 가지다.

장 폴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으로서 자본가계급의 착취를 폭로하고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이들에게 부여된 의무다.

장 폴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으로서 자본가계급의 착취를 폭로하고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이들에게 부여된 의무다.


하나는 지식인의 역할과 책임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고전이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이다. 그리고 이 지식인에게 부여된 의무는 자본가 계급의 착취를 폭로하고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비판적 지식인의 금과옥조가 됐다.

다른 하나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도전적인 문제 제기는 미셸 푸코에 의해 이뤄졌다. 푸코의 주장은 간명하지만 전복적이다. 지식의 생산 속에 권력이 관철돼 있는 동시에 권력은 자신의 행사를 위해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지식에 내재한 권력적 속성을 성찰하게 했고, 지식인이 맡아온 계몽적 역할을 회의하게 했다.

지식인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주목할 연구로는 사회학자 강수택의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를 들 수 있다. 그는 지난 20세기 지식인론을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눠 살펴봤다. 카를 만하임(자유부동하는 지식인론), 안토니오 그람시(유기적 지식인론), 사르트르(실존주의적 지식인론)가 한 그룹이라면, 푸코(특수적 지식인론),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지식인 종언론), 지그문트 바우만(탈근대적 지식인론)이 다른 그룹이다.

주목할 것은 두 그룹의 차이다. 앞의 그룹이 20세기 전반과 중반에 활동했다면, 뒤의 그룹은 20세기 후반에 담론을 펼쳤다. 21세기 현재의 시점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후자의 그룹이다. 푸코가 앞서 말했듯 지식-관력 관계에 주목해 보편적 지식인론을 비판했다면, 리오타르는 탈현대적 조건 아래서 거대 담론과 보편주의 내러티브에 의존하는 지식인의 몰락을 주장했고, 바우만은 입법자로서의 위상을 대신하는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프랑스에 사르트르와 푸코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노암 촘스키가 있었다. 촘스키에게 지식인이란 정부의 허위를 폭로하고 그 문제점ㆍ동기ㆍ감춰진 의도를 분석해야 하는 이들이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다.” ‘지식인의 책무’에서 촘스키가 주장했던 유명한 언명이다.

노엄 촘스키는 그의 저서 '지식인의 책무'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라고 강조한다.

노엄 촘스키는 그의 저서 '지식인의 책무'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라고 강조한다.


가치중립적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 촘스키는 이례적인 존재였다. 자유와 다양성 등 민주적 가치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이 촘스키가 강조하는 지식인의 본분이었다. 그는 빌헬름 폰 훔볼트, 존 듀이, 조지 오웰, 버트런드 러셀 등으로부터 영향 받았다. 특히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던 러셀의 현실 참여는 촘스키의 정치적 행동주의에 모범이 됐다.

이러한 촘스키의 태도에 비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촘스키가 미국 정부의 테러리즘에 엄격한 반면 이슬람 단체의 테러리즘에는 관대한 이중 잣대를 갖고 있다는 게 대표적인 비판이었다. 미국 정부 정책과 언론 보도에 대한 촘스키의 가차 없는 폭로는 보수 언론은 물론 뉴욕타임스 등 진보 언론과도 불편한 관계를 갖게 했다. 촘스키에게 진실의 언어와 권력의 비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20세기 지식인론에 대한 회고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는 지식인의 분화다. 지식인 가운데 특히 교수는 ‘전문적 지식인’과 ‘공적 지식인’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전문적 지식인이 자기 전공에 충실한 지식인이라면, 공적 지식인은 자기 사회에 대한 공적 발언과 실천에 주력하는 지식인이다. 20세기 지식인 담론은 주로 공적 지식인의 역할과 책임에 맞춰져 있었고, 앞서 말한 사르트르, 푸코, 촘스키는 이 공적 지식인의 대표격이었다.

2020년대와 지식인의 미래

지난 20세기 후반 서구 지식인 담론에서는 새로운 경향이 관찰됐다. 하나는 거대 담론으로부터의 후퇴다. 특히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지식인에게 큰 타격을 안겼다. 그 결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계몽이라는 고전적 지식인상은 적잖이 힘을 잃었다.

다른 하나는 ‘종합적 지식인’의 퇴장이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지식의 무한 진화에 있다면, 이러한 변화는 지식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르네상스적 지식인’을 불가능한 기획으로 만들었다. 사르트르, 움베르토 에코, 바우만 등이 마지막 르네상스적 지적 거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020년대에 지식인의 미래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먼저 주목할 것은 지식인이 마주한 21세기의 사회 변화다. 세 가지가 특기할 만하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이 세상에 보편적 진리는 부재하고 각자의 진리만 존재한다. 이러한 극단적 상대주의 진리관은 지식인의 계몽적 역할을 약화시켰다. 지식인은 이제 누구도 보편적 진리를 독점할 수 없고, 각자의 진리를 전달할 뿐이다.

둘째, 정치적 양극화의 강화다. 오늘날 포퓰리즘이 두드러진 나라의 경우, 특히 미국 등에서 정치적 양극화가 강화되면서 지식인의 이념적 성향이 외려 강화하고 있다. 지식인은 사유의 자유를 추구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회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불평등이 우리 시대의 화두인 한 불평등 해결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공적 지식인에게 갈수록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셋째, 집단지성의 등장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정보사회의 진전은 시민들로 하여금 더 많은 지식의 공유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현실은 ‘나보다 더 똑똑한 우리’로서의 집단지성을 등장시켰다. 오늘날 집단지성의 존재는 지식인의 전문성에 회의를 품게 하고, 지식인의 존재 전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2020년대가 열린 현재, 근대의 모범적 지식인상이었던 계몽주의자로서의 지식인론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오늘날 초연결 정보사회의 지식의 바다에선 불가능한 기획이다. 지식인도 이제 ‘지식인이라는 특수한 존재’에 앞서 ‘시민이라는 일반적 존재’라는 점을 자각하고, 자신의 사유와 실천에 이를 적극 고려해야 한다.

요컨대,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미덕은 ‘계몽과 충고’가 아니라 ‘공감과 설득’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지식인에겐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그 성찰에 요구되는 것은 더 많은 공감을 모을 수 있고 수직적 관점의 충고가 아니라 수평적 관점의 설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사회와 지식인

김병익(왼쪽)이 자유주의 지식인을 대표했다면, 김동춘은 진보주의 지식인을 대변했다. 2010년 4.19혁명 50주년 기념 좌담을 위해 모인 둘.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병익(왼쪽)이 자유주의 지식인을 대표했다면, 김동춘은 진보주의 지식인을 대변했다. 2010년 4.19혁명 50주년 기념 좌담을 위해 모인 둘.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론은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크게 분출했다. 사회학자 김동춘과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이를 다룬 대표적인 지식인들이었다. 김동춘은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에서 사르트르와 유사하게 지식인이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옹호는 지식인에게 부여된 당연한 책무라는 것이었다.

김동춘이 진보주의 지식인을 대변했다면, 김병익은 자유주의 지식인을 대표했다. 김병익은 ‘지식인됨의 괴로움’에서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고민을 토로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지식인의 창조적이며 비판적인 자유였다. 이러한 김병익의 논리는 권위주의 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자유주의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반영하고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사회 지식인도 서구 사회와 유사한 변동을 겪게 됐다. 앞서 지적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정치 양극화의 강화, 집단지성의 등장은 우리 사회 지식인의 사유와 실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르네상스적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념적 구속에서 자유로운 공적 지식인도 사실상 부재한다. 그리고 지식인의 전문성에 대한 시민적 신뢰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함의하는 바는 우리 사회 지식인에게도 공감과 설득이 갈수록 중요한 태도가 된다는 점이다. 정보사회가 지식사회인 한, 지식 탐구와 권력 비판이라는 지식인에게 부여된 고유한 역할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지식인의 자기 정체성이 갈수록 중요해진다는 사실을 지식인들은 명심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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