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민 사회가 풀지 못한 오랜 숙제, 전쟁
◇ 8?15, 한국에서는 광복절이자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
8월 15일은 한일 양국에 뜻깊은 날이다. 한국에서는 이 날이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 광명을 되찾은 날, 광복절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대동아 공영’ 이라는 기만적인 기치 아래 자행되던 호전적인 제국주의가 종지부를 찍은 날이다. 법정 공휴일은 아니지만 ‘종전기념일’ 이라고 불리며, 전사자를 위한 추도식도 열린다.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날에는 한일 양국의 어긋난 근대사와 뒤엉킨 정서를 곱씹게 된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결성한 동맹군과 미국 영국 등이 힘을 모은 연합군이 세계 곳곳에서 맞붙은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낳았다. 전쟁의 막바지에 일본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정면으로 맞붙었다. 좀처럼 항복하지 않는 일본을 상대로 속을 태우던 미군은 급기야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 순식간에 수십만 명이 목숨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 나아가 당시 소련까지 대일 참전을 선언하자 일제는 그제서야 패배를 인정, 8월 15일에 항복 의사를 공식화했다.
그 때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공인된 정부를 수립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항복을 받는 입장인 연합군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연합군이 일본에 항복의 조건으로 내건 ‘포츠담 선언’에 한반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가 아니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 선언을 수락하는 형식을 취한 일본의 항복이 곧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권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런 경위 속에서 일본의 패전일이 한반도의 광복절이 된 것이었다.
사실 일제가 항복의 의사를 연합군에 전달한 것은 공식 발표가 있기 하루 전인 8월 14일이어서, 역사가들은 그 날을 일본이 항복한 날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은 9월 2일로, 참전한 대부분의 서방국은 이 날을 일본에 대한 승전일로 기념한다. 중국, 그리고 소련의 후임을 자처하는 러시아에서 기념하는 대일 승전기념일은 이보다 하루 늦은 9월 3일로, 어쨌든 간에 8월 15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해서 매년 8월 15일을 기리는 나라는 필자가 아는 한 한국과 일본 뿐이다.
◇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울려 퍼진 항복 선언
8월 15일이 한일 양국에서 중요한 날로 기억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 날, 당시 가장 ‘핫’한 미디어였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제가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이 공표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대미문의 라디오 방송은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를 비롯해, 대만, 만주에도 송출되었다. 일본의 패망과 식민지 체제의 종식을 알리는 이 방송이 한반도의 민중에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한편, 방송에 대한 일본 대중의 반응은 복잡다단했다. 패배에 크게 실망해 대성통곡하는 이도 있고 항복 선언을 믿지 않으려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바로 엊그제까지도 일본군의 승전보를 알리는 프로파간다만 흘러나오던 라디오에서, 돌연 청천벽력같은 항복 선언이니 믿기 어려웠을 만도 하다. 목소리를 높여 기뻐하지는 못했지만 사실은 많은 일본인이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쟁에 패배했다는 소식에 못지않게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이 선언이 ‘천황’의 육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 날 정오 라디오 전파를 탄 종전 선언을 ‘교쿠온’( ‘玉音(옥음)’의 일본어 발음, ‘임금의 목소리’를 뜻한다) 방송이라고 부르는데,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져 온 히로히토가 대중들 앞에 실체를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천황’이야말로 신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나라의 주인이며, 그를 위해 적과 싸우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고 선전해 왔다. 항복을 선언하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일본 대중들은 그 역시 자신과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불과 70여년 전에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운 기이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은 이성보다 광기에 가까운 법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항복이 선언된 이 날을 ‘패전일’이 아니라 ‘종전일’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침략 전쟁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특히 과거사에 대한 관점이 현저하게 우경화하는 상황에서 ‘종전일’ 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과 동맹이었던 독일에서는 시민 사회가 앞장서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고 전쟁 피해자에게 적극적으로 보상하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전후 처리 문제가 대체로 정부의 손에 맡겨졌고, 전쟁 피해자와 관련한 사안을 인권 문제가 아니라 정치 외교적 현안으로 보는 관점이 문제시되어 왔다.
◇ 왜 ‘패전일’이 아니라 ‘종전일’일까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본인 친구와 술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친구는 전쟁 피해자 보상에 미온적인 일본 정부에 매우 비판적인 지식인이었는데, 술이 한참 들어간 뒤에 시민으로서 느끼는 딜레마를 털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독일 시민은 두 번의 총선을 통해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에 힘을 몰아준 전력이 있다. 시민 사회가 나치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한 만큼, 침략과 살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마땅하다. 이에 비해, 일제가 전쟁을 자행하던 당시 일본 사회는 전근대적인 군주제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첫발도 내딛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학 기술과 군수 산업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즉, 일제의 침략 전쟁은 시민으로부터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받지 않은 무법적 만행이었다. 이런 속사정을 따지자면 전쟁의 책임 소재를 내부적으로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제국주의 정권이 가해자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일본의 민중도 폭주하는 권력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정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쟁을 둘러싼 이런 복잡한 정서를 배경으로, ‘종전일’ 이라는 애매한 표현이 일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도 히틀러의 패망을 ‘패전’이라고 할 지 ‘종전’이라고 할 지 논란이 있었다. 침략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패전’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우세한 때도 있었고, 전쟁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미래지향적 결기를 보이기에는 ‘종전’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우세한 적도 있었다. 전쟁이 수행되는 와중에 나치 정권에 대차게 항거한 국내 세력도 있었던 터라 패전을 ‘해방’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과격한 의견도 제기된 적이 있었다. 전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말 일본의 ‘종전일’이 75주년을 맞이했다. 이 날 정치인들은 줄지어 전범이 합사된 종교 시설(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고, 국가 수장의 기념사에서는 역사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 대신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수상쩍은 개념이 등장했다. 침략 전쟁의 본질을 외면하겠다는 듯한 기만적인 전쟁관이 위험스럽다. 사실 그보다 더 위태롭게 보이는 것은, 우익 정치인의 이런 앙상한 주장 이외에 전쟁에 대한 심도깊고 다양한 의견이 시민 사회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듯한 현 상황이다. 일제의 무법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의 시민이 명명백백한 전쟁의 주체라고 단언하기에 애매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민 사회가 이 문제를 방관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전쟁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 전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패전’이든 ‘종전’이든 혹은 ‘해방’이 되든, 과거 침략 전쟁의 과오를 직시하고 대내외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이 끝난 지 75년이 되도록 일본 시민 사회가 풀지 못한 숙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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