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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도 나무도 결국은 기다림이다

입력
2020.08.11 18:16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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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
이유미국립세종수목원장
뉴턴의 사과나무 4대손에서 속리산 정이품송 후계목까지 갓 심어진 나무들입니다. 땅 위가 아니라 땅속에서 빨리 먼저 터를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국립세종수목원)

뉴턴의 사과나무 4대손에서 속리산 정이품송 후계목까지 갓 심어진 나무들입니다. 땅 위가 아니라 땅속에서 빨리 먼저 터를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국립세종수목원)



저까지 비 이야기를 하며 근심을 보태기는 싫지만, 그래도 비가 너무 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산림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물어서 산불 위험이 크다고 연일 비상소식을 울려댔었는데, 이젠 쉼 없이 산사태의 위험을 알리는 소식이 뜹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비로 인해 산의 물 담기 능력은 한계에 달한 것 같습니다. 산사태 위험이라는 소식은 지금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느끼게 해 줍니다.

화개장터에 물이 찬 모습은 참 놀랍고 참담했습니다. 대학교 연습림이 지리산에 있어서 수없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만났던 마을들입니다. 너나없이 산이 깊고 나무도 울창하여 가뭄도 홍수도 모른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말입니다.

산이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은, 나무뿌리들이 흙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는 나무 자체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땅에서 생장에 필요한 물과 양분을 빨아올리는 일을 하지요. 식물의 뿌리는 흔히 직경에 따라 구분을 하는데 2㎜ 이하를 잔뿌리 혹은 실뿌리라고 하고, 2㎝ 이상은 굵은 뿌리라고 합니다. 물과 양분을 흡수하는 잔뿌리는 땅속 30㎝ 안에 전체 뿌리의 85%가, 주로 지탱 역할을 하는 굵은 뿌리도 60㎝ 안에서 대부분 자랍니다. 이런 다양한 굵기의 뿌리들이 흙들을 서로 엉켜 잡고 이어져, 그렇게 산의 표면이 유지되는 것이지요. 큰 비에 버터 내는 힘의 일부도 결국은 흙과 식물 뿌리들이 서로 얼마만큼 긴밀하게 얽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곳 수목원에 와서 가장 많이 한 염려의 하나는 심은 나무들의 활착이었습니다. 옮겨 심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나무들은 제대로 자리 잡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무의 굵은 뿌리가 지상부의 큰 나무줄기를 버텨낼 만큼 단단하게 자리 잡는 일도 중요해서 흔들거리지 않고 단단히 흙을 붙잡으라고 버팀목도 세워주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수분과 양분을 제대로 흡수해 공급해 주어야 할 실뿌리들입니다. 옮겨 오느라 상한 수많은 실뿌리가 낯선 흙에 속속들이 뻗어가야만, 그렇게 해서 자리를 잡고 제 기능을 해야만, 비로소 잎이 피고 가지를 뻗으며 나무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름에 나무를 옮겨 심지 않는 이유도 알고 보면, 흙 속에 실뿌리들이 제 기능을 하여 수분을 공급하기도 전에 잎에서 많은 증발산이 일어나서입니다. 중장비들이 오가며 다져진 땅에는 아무리 공들여 나무를 심어도 결국은 시름시름 죽어 가는 이유도 흙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무너져 그 속에 나무들이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죠.

흙이란 암석이나 동식물이 죽고 난 후 흔적들이 오랜 침식과 풍화를 거쳐 생성된 땅을 구성하는 물질입니다. 길고 긴 세월의 산물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흙의 입자들이 유기물들과 엮여 적절한 공극을 만들고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잘 유지할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은 미생물까지 수많은 생명을 품고, 극심한 환경을 견뎌내는 건강한 흙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은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지요.

오래전 들었는데 잊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무를 크게 키우고 싶으면 100달러짜리 큰 나무를 심어서는 안 되고, 1달러짜리 나무를 심으며 흙에 99달러를 투자해야 훨씬 크게 빨리 키워 낸다는 가르침입니다. 흙도 나무도 기다림을 이야기합니다. 기상이변을 포함하여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비상식은 우리가 여전히 눈앞에 있는 것을 좇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싶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유미 국립세종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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