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학을 떠난 미국인 학생 로런 엘킨은 독특한 이유로 파리에 매료됐다. 뉴욕과 달리 파리에선 아무 목적 없이 몇 시간씩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어딜 가든 차로 이동하는 미국에선 특별한 목적 없이 도시를 걷는 건 위험하거나 괴상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신나게 파리를 걷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프랑스어로 ‘천천히 걸으며 도시를 관찰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는 왜 남성형 명사 ‘플라네르(flaneur)’ 밖에 없을까.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플라네르에 대응하는 여성형 명사 ‘플라네즈’는 존재했지만, '산보하는 여자'가 아니라 '정처없이 막 돌아다니는 여자'란 의미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잘 쓰이지 않았다. 하기야 오랫동안 여자는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지 못하는 존재였으니 그럴 수밖에. 도시를 산보하는 건 남성만의 특권이었다.
저자는 '플라네르'가 아닌 '플라네즈'의 입장에서 도시 걷기를 묘사하기로 했다. 도시가 여성을 배제한 방식, 그 배제 속에서도 여성들이 누린 자유와 기쁨을 찾아냈다.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베네치아를 걸으며 저자보다 앞서 이 도시를 걸었을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다시 읽는다.
조르주 상드는 남자 옷을 입고서야 주변 눈치 보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그의 작품 속 여주인공도 남장을 함으로써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성별 간의 불평등을 인지한다. “혼자 런던을 걷는 게 최고의 휴식”이라던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의 길 위에서 글쓰기 재료를 찾았다.
저자는 이 기나긴 여정을 고향인 뉴욕에서 끝내며 “뉴욕을 떠났기 때문에 새롭게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도시를 중심으로 여행 에세이와 개인적 회고록, 여성 작가들이 남긴 역사를 하나로 엮어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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