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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란 이름의 화폐

입력
2020.08.05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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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다
부를 쌓고 과시하고 대물림하는 대상
그 오랜 욕망과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5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송파구 잠실 아파트 단지가 안개 속에 잠겨 있다.연합뉴스

5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송파구 잠실 아파트 단지가 안개 속에 잠겨 있다.연합뉴스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연방에 속한 야프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섬이다. 약 1,500년 전부터 이 섬 주민들은 정교한 화폐제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사용하는 화폐는 ‘페이’(fei)라고 불리는 바퀴 모양의 돌로 지름이 작은 것은 30㎝부터 큰 것은 무려 360㎝에 무게가 4톤에 달한다. 이 돌 화폐는 야프에서 500㎞ 떨어진 팔라우의 바벨다오브섬에서 캐낸 것이다. 돌의 가치는 주로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페이 가운데 있는 구멍은 이 돌을 옮길 때 필요한 막대기를 꽂으려고 뚫어 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옮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도 있다. 그래도 페이의 소유권이 옮겨졌다는 최소한의 확인만 받으면, 거래가 이뤄지고 채권 채무를 상쇄한다. 그렇게 페이는 야프섬 주민들 재산의 근원이 됐다. 화폐의 본질은 교환의 매개체가 아니라 ‘양도 가능한 신용’이라는 점을 야프섬 주민들이 보여준다.

야프섬의 페이가 떠오른 것은 최근 화제가 됐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금부 분리’(금융-부동산 분리) 발언을 접하면서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이를 ‘듣보잡 이론’이라 폄하했지만, 지금 전 국민 골칫거리인 ‘서울 집값’의 핵심을 건드린 것이다. 다만 추 장관의 주장처럼 그 기원은 ‘박정희 개발독재’보다 훨씬 오래됐고, 둘의 관계도 뜯어말리면 헤어질 수 있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아파트는 한국판 ‘페이’이다. 어떤 물체가 화폐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가치를 지니고, 거래에 동원할 만큼 적당한 양이 존재하며, 내구성이 길고 신뢰할 만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한국은행권 말고 아파트만큼 화폐의 속성을 갖춘 재화가 또 있을까. 아파트는 ‘어느 동네 몇 평’인지만 알면 찾아가 확인하지 않아도 가격이 얼마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준화 돼 있어 거래가 쉽다. 또 일단 아파트를 소유하면 담보로 돈을 빌리거나, 세를 놓아 이익을 거둘 수도 있다.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라, 부를 저장하고 늘리고 대물릴 수도 있는 화폐이다. 그리고 서울 강남처럼 인기가 높을수록 가치가 더 잘 유지된다. 여기에 서울은 교육ㆍ문화ㆍ인맥 등 무형의 가치도 오랜 기간 축적돼 있다. 오죽하면 200년 전 유배 간 다산 정약용도 아들들에게 “뒷날 계획은 오직 서울의 십 리 안에 거처하는 것”이란 편지를 보냈을까.

그렇다고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오를 수는 없다. 아파트 대출이 쉬운 만큼 대출받아 아파트를 사려는 수요가 늘어나며, 빚이 더 큰 빚을 만드는 악순환은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화폐가 지닌 숙명이다.

정부의 주택시장 대책이 ‘8ㆍ4 공급대책’으로 일단 마무리됐다. ‘다주택자는 집을 팔고, 고가주택은 세금을 더 내라’는 정부 정책의 칼끝은 화폐가 된 아파트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 집 마련의 주요 수단인 전세 끼고 집 사기나 주택담보 대출의 통로마저 크게 줄어들었다. ‘빚내서 집 사거나, 집으로 돈 벌 생각하지 말라’는 선전포고이다.

하지만 정부 정책 몇 개로 아파트란 화폐를 단기간에 ‘주거지’란 본래 가치로 되돌리기는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집만큼 안전한 자산이 없다’는 오랜 믿음과 ‘내 집 마련’이란 절박한 꿈을 단칼에 잘라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성과 욕망은 끈질기게 현 정책을 무력화할 방안을 찾아낼 것이다. 이미 재건축 단지 주민과 그 지역 정치인들이 정부 정책에 대해 저항을 시작했다.

정부가 힘만 내세워서는 결코 이 장기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집의 노예에서 벗어난 날”이라는 자화자찬은 너무 순진하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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