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증거인멸에 골치 아픈 법조계
편집자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 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한국일보>
증거인멸 사건 재판에선 때로 예기치 못한 논란이 불거진다. 범죄를 주도한 상급자의 범행 증거를 하급자가 인멸한 경우, 주범도 아닌 하급자만 증거인멸죄 처벌을 받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증거인멸죄 처벌 대상을 ‘타인의 형사사건에 대한 증거를 인멸ㆍ은닉ㆍ위조ㆍ변조한 자’로 규정한 형법 제155조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피의자 또는 피고인인 사건에서 증거를 인멸하거나 조작해도 별도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범죄자가 증거를 인멸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거나 ‘헌법에 보장된 방어권 인정’ 등의 이유로 현행 법체계는 ‘타인의 형사사건’으로 증거인멸죄 적용 범위를 제한했다. 친족이나 동거 가족을 위한 증거인멸도 처벌이 면해진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자기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해 달라고 요청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우에 따라선 ‘교사범’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최근 정경심 동양대 교수 사건 재판에서 쟁점이 됐던 것도 이 부분이다. 검찰은 정 교수를 증거인멸 및 은닉의 교사범으로 보는 반면, 정 교수 측은 “증거인멸을 지시한 게 아니라, 본인 증거를 숨기는 데 가담한 공동정범에 불과하다”면서 맞서고 있다.
이런 경우에 교사죄가 인정되려면 ‘구체적 지시’가 있었고, 그 지시가 형사사건의 반론권을 넘어섰다고 평가할 만해야 한다. 물론 대법원 판례는 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 은닉을 위해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도 원칙적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있다.
증거인멸에서 방어권을 이처럼 넓게 인정하다 보니 불공정한 상황도 벌어진다. 상부 지시로 증거인멸에 가담한 말단 직원은 처벌 받는데, 정작 범행을 저지른 ‘윗선’은 처벌을 피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명박 정부 시절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서 청와대의 증거인멸 지시를 폭로한 장진수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이 대표적이다.
2010년 검찰의 이 사건 1차 수사 때, 장 전 주무관은 상사인 진경락 전 기획총괄과장과 함께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됐다. 그런데 혼자서만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그에게 “위법한 지시를 따르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으나, 진 전 과장에겐 “본인이 향후 수사를 받을 수 있다고 걱정해 증거를 인멸한 것”이라며 무죄로 판단했다. 증거인멸죄 적용 범위를 ‘타인의 형사사건’으로 한정한 법 규정이 빚어낸 아이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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