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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자료 삭제? 수사현장 증거인멸 백태

입력
2020.08.03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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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증거인멸에 골치 아픈 법조계
2000년 98명 → 2018년엔 751명 입건
지능화하는 은폐 수법에 검경도 수사 강화

편집자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 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지난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기소된 안종범(왼쪽)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2018년 4월 11일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당시 안 전 수석이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해 휴대폰에 저장된 증거를 없애는 방법을 적어둔 문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기소된 안종범(왼쪽)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2018년 4월 11일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당시 안 전 수석이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해 휴대폰에 저장된 증거를 없애는 방법을 적어둔 문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휴대폰 교체가 가장 중요 ▲휴대폰 액정 우측 상단 3분의1 지점을 집중 타격해 부숴야 ▲휴대폰은 전자레인지에 돌려 물리적으로 복원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안전 ▲연락처를 삭제해 카카오톡 자동 친구 등재되는 것을 방지할 필요


범죄 영화의 대사가 아니다. 2016년 전국을 뒤흔든 ‘국정농단’ 사건 수사 당시 안종범(61)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해 준비했던 문건의 일부 내용이다. 실제로 휴대폰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데이터 복원이 가능하다지만, 그의 상세한 ‘조언’이 범죄자들 사이에서 참고서처럼 퍼졌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고스란히 담긴 휴대폰을 증거물로 확보하려는 수사기관과, 이를 철저히 감추려는 피의자 사이에 치열한 머리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증거인멸 행위는 수사와 재판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골칫거리다. 더군다나 전자기기의 발달로 그 유형도 다양화하고 있다. 법정에서 유ㆍ무죄를 다투는 검사와 변호사는 증거인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증거인멸 입건, 18년새 8배나 늘어

2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2000년 증거인멸 혐의로 입건된 인원은 98명에 그쳤으나 매년 꾸준히 늘어 2018년에는 751명까지 치솟았다. 같은 기간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된 인원도 22명에서 59명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나 실제 범죄현장에서 발생하는 증거인멸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법상 증거인멸죄는 피의자 본인이 직접 증거를 감추거나 없앨 땐 적용되지 않으며,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하는 이상 증거인멸 혐의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검찰과 경찰이 증거인멸 사건을 적극 수사하는 경향도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검찰의 증거인멸 사건 처리 인원 수. 그래픽 김대훈 기자

검찰의 증거인멸 사건 처리 인원 수. 그래픽 김대훈 기자


법조계에선 다음과 같이 입을 모은다. “예나 지금이나 증거인멸이 횡행하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자기기의 발달로 그 범위는 더욱 넓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안 전 수석 사례처럼 ‘전자기기 속의 증거 자료를 숨기는 수법’에 대한 얘기가 많다. 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해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완전 삭제하는 ‘디가우징’, 수차례 데이터를 덮어 쓰는 등의 ‘안티포렌식’은 익히 알려진 기법이다.

특히 기업 사건에서 증거인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 및 분식회계 혐의로 최근 검찰 수사를 받은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공장 바닥을 뜯어내 노트북과 서버를 숨긴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 2011년 최태원 SK그룹 회장 일가의 횡령 의혹 사건에서,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 회사 측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대거 교체하는 작업에 나선 사례도 있다.

의뢰인의 증거인멸, 변호사들도 난감

의뢰인 본인이나 주변 인물이 증거를 감추거나 없애 버렸다면, 변호인으로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으로 사건을 해결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핵심 증거가 적을수록 무죄 가능성은 높아질 테니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살 길을 찾겠다고 했던 증거인멸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낳는 경우가 있다. 꾸준히 발달해 온 포렌식 기술 탓에 삭제된 증거 자료가 복원되기 일쑤다. 자료 자체를 없앨 순 있어도 ‘인멸의 흔적’까지 지우진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이럴 경우 피의자는 '증거인멸 우려' 탓에 구속이 될 수도 있고, 나중에 공판에서는 양형 가중 사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태우는 격이 될 수 있는 셈이다.

변호사들에게도 말 못할 고충이 있다. 의뢰인이 들통날 게 뻔한 장소에 증거물을 숨기고는 변호인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다 걸린다거나, 허겁지겁 증거인멸 행위를 하는 바람에 정작 ‘유리한 증거’까지 함께 없애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물론 변호사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증거인멸의 공범’으로 몰리는 것이다. 변호사 자격 박탈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허윤 법무법인 강남 변호사는 “예상치 못한 증거 인멸 정황이 나오면 변호 전략 자체가 흐트러지는 데다, 수사기관에서는 곧바로 ‘교사나 방조를 했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변호사들 역시 증거인멸이 발생하는 상황이 곤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대형 로펌이 기업을 상대로 준법 자문을 할 때 가장 강조하는 내용 중 하나로 “어차피 흔적은 다 남는다. 증거인멸만은 절대 하지 말라”는 원칙을 꼽는 이유다.

늘어나는 '증거인멸 수사', 과도한 압박인가

그렇지만 증거인멸로 가장 골머리를 썩는 곳은 역시 수사기관이다. 특히 기업 차원에서의 조직적 증거인멸이 그렇다. 증거인멸 사건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본건 수사마저 벽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엔 여러 배경이 있지만, 수사 절차상 피의자 또는 참고인에게 보장된 권리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진 탓이 크다. 예컨대 과거에는 증거인멸에 관여한 직원들을 참고인으로 소환하면 어느 정도 유의미한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이제는 증거인멸의 피의자로 부르거나 체포하기 전까진 출석 요구에도 잘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수사기관이 쓸 만한 ‘압박 카드’가 줄어든 것이다.

증거인멸을 별도 범죄로 수사하지 않던 검찰이 2000년대 이후 증거인멸 수사를 대폭 확대한 것도 이런 경향과 맞물려 있다. 수도권 검찰청 부장검사는 “기업의 증거 인멸은 힘 없는 말단 직원들이 실행자인 경우가 많아 예전에는 굳이 입건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환경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수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 재수사 등 굵직한 사건들에서 검찰이 증거인멸 부분을 먼저 재판에 넘긴 건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가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 관련 증거인멸교사 혐의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 위해 지난해 5월 24일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가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 관련 증거인멸교사 혐의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 위해 지난해 5월 24일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압박 수사’라는 비판도 나온다. 법무법인 이공의 양홍석 변호사는 “참고인들을 고립시키고 진술을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과도하게 증거인멸 카드를 꺼내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충분한 물적 증거 없이는 공소유지가 어려워지는 데다, 증거인멸 방법마저 더욱 치밀해지는 현 상황을 등한시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많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이 제한되고 증거인멸 수법도 더 지능화되면 법정에선 별별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며 “완벽한 처벌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현실에서 유죄협상제도(플리바게닝) 허용 등을 통해 균형을 맞추려는 고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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