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운도 실력’이라는 말을 듣는다. 마키아벨리는 '운의 활용(대처) 능력'을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라고 주창했다. 스페인 프로축구 레알 마드리드의 지네딘 지단 감독은 자기 팬들한테도 ‘운 좋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4년 동안 쟁취한 트로피 11개가 행운의 결과였다고?
지단의 레알 감독 생활은 시작부터 푸대접이었다. 레알 B팀(카스티야)에서 평범하게 지내던 지단 감독은 2016년 1월 갑자기 1군 감독으로 승격했다. 처절한 리그 성적(3위)을 참지 못한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라파엘 베니테즈를 쫓아내고 지단 감독을 앉혔다. 카탈루냐 언론은 1군 지도 경력이 전무한 스타 출신 감독을 “일회용 반창고”라고 깎아내렸다.
감독 데뷔전 5-0 대승은 대반전의 출발점이었다. 짜증만 내던 선수들이 웃기 시작하면서 레알은 잔여 20경기에서 17승을 따냈다. 바르셀로나 1점 뒤져 리그 우승을 놓쳤지만 엘클라시코 원정 승리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지단 감독은 반쪽 시즌을 눈부시게 마무리했다.
이후 2018년 여름 자진 하차까지 지단 감독과 레알은 챔피언스리그 3연패, UEFA슈퍼컵 우승 2회, 라리가 우승 1회, 수페르코파 우승 2회, 클럽월드컵 우승 2회로 내달렸다. ‘초짜’ 감독 아래서 1950년대 이후 레알의 두 번째 황금기가 활짝 열린 것이다. 2019년 3월 엉망이 된 레알로 돌아온 지단 감독은 바르셀로나에 승점 19점이나 뒤진 채 시즌을 마감했다. 1년 뒤 지단 감독은 거의 같은 멤버로 라리가에서 또 우승했다.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운 좋은 감독’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하다. 하지만 지단 감독은 누구보다 영리하게 상황을 파악한다. 레알은 거대한 자아들이 모인 집단이다. 기술 연마보다 팀 분위기, 스타 개인의 심리상태가 훨씬 중요하다는 뜻이다. 90년대 유벤투스 시절 스승인 마르셀로 리피 감독(2006월드컵 우승)은 “지단, 델피에로, 비에리 같은 선수들에게 뭘 더 가르치겠는가”라고 말했다.
전임자 베니테스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프리킥 기술을 가르치려 들다가 슈퍼스타의 심기를 건드렸다. 지단 감독은 선수들을 가르치기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마음과 존경을 얻는다. 콧대 높은 호날두가 시즌 도중 로테이션 운용을 받아들였고, 2017년 여름 굳혔던 이적 결심도 지단 감독의 만류로 1년 미뤘다. RB 라이프치히의 율리안 나겔스만 감독은 “감독의 30%는 전술, 70%는 관계 쌓기”라고 말한다. 나머지 70%에서 지단 감독은 만점인 셈이다.
선수 시절 지단은 어려운 플레이도 쉽게 해내는 천재였다. 그런 성향이 지도 철학에서도 흐른다. 지단 감독은 “축구는 복잡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인터뷰에서도 전술 용어보다 열정, 희망, 노력, 감사 등의 추상적 단어를 애용한다. 레알 전 감독 호르헤 발다노는 “지단은 축구를 단순화하는 재주가 있다. 모든 것을 알기에 가능하다”라고 평가했다. 증거도 많다. 카세미루의 중용은 신의 한 수였다.
이스코도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2018년 UEFA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교체로 넣은 가레스 베일이 두 골을 터트려 대회 3연패 영웅이 되었다. 올 시즌 레알은 무려 21명이 득점을 기록했을 정도로 스쿼드 균형이 좋았다. 전술이 없는 감독의 팀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2016년 11월 아틀레티코 원정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지단 감독은 “중원이 셋이든 넷이든 큰 차이는 없다. 타이트하게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경기에서 레알은 3-0으로 완승했다.
UEFA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 감독은 밥 페이즐리(리버풀), 카를로 안첼로티(AC밀란, 레알)와 지단 세 사람뿐이다. 레알 역대 감독 중 우승 타이틀이 두 번째로 많다. 행운의 결과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눈부신 업적이다. 생전 스티브 잡스는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싶으면 리더가 되지 말고 아이스크림을 팔아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리더는 다양하다. 온화한 미소로 아이스크림을 파는 동시에 우승도 계속해대는 지단 감독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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