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인천 남동구 한 오피스텔에서 30대 남성이 전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숨진 남성은 1년간 사귀다 헤어진 여성을 살해하기 전 수차례 찾아가 때리거나 신용카드를 뺏기도 했다. 피해 여성은 당시 경찰에 신고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지난 일이니) 고소를 하세요"였다.
당시 인천경찰청 제2부장이었던 김헌기(56ㆍ경무관) 인천청 제1부장은 "당시에는 데이트폭력이 발생하면 경찰은 사후 처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며 "사생활영역, 사랑싸움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상대방에게 경고를 하거나 보호 조치를 해야 하는데 방치했고 결국 2명이 숨졌다"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2016년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데이트폭력 대응체제부터 만들었다. 그해 경찰은 전국에 데이트폭력 근절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고 집중 대응에 나섰다.
인질사건 전문대응팀을 2014년 전국 지방경찰청에 설치한 것도 그의 작품이다. 2007년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유괴ㆍ살해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인질사건 전문대응팀은 2015년 각 경찰서로 확대됐다.
그는 "당시 인천에는 인질ㆍ유괴사건 경험자가 한 명도 없었다"며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죄책감이 경찰청 강력범죄수사과장이 되고 나서 인질사건 전문대응팀을 신설한 이유"라고 말했다.
은행 창구에서 1,000만원 이상 인출할 때 은행이 의무적으로 112 신고를 하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그는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피해가 급증해 범정부적으로 대응을 하던 2015년 사건을 분석해 보니 범죄의 길목이 피해자가 돈을 뽑는 은행 창구였다"고 말했다.
김 1부장의 남다른 경찰 인생은 2007년 발생한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다룬 소설 '부러진 화살'의 서형(필명) 작가가 그의 이야기를 온라인으로 연재하면서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른바 '김광준 검사 비리 사건'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 10억원대 뇌물을 받은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된 김 전 검사는 검경 수사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내용의 옥중 편지를 서형 작가에게 보냈고 이 편지는 한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검찰에서 특임검사를 임명해 경찰에게 손을 떼게 해 검경 갈등으로까지 이어진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김 1부장은 해당 편지를 공개한 언론사에 "부정부패사범이 주장하는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고 항의했고 이후 서형 작가를 알게 됐다.
김 전 검사 수사 당시 당시 경찰청장이 조현오 전 청장, 수사기획관이 황운하 전 대전경찰청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능범죄수사과장이 김 1부장, 지능범죄수사대장이 박관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이었다.
검경 수사권 조정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서형 작가는 2015년 조 전 청장의 인생을 다룬 '구겨진 제복', 2018년 황 전 청장을 주인공으로 한 '풍운아 황운하'를 쓴 데 이어 세번째로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이라는 글을 블로그에 연재 중이다. 지난달 24일 제1화를 선보인데 이어 7회까지 연재됐다.
서형 작가는 "2020년 1월 국회는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처리, 경찰 수사 재량이 더 확대됐다. 유능한 선배 인생에서 자극을 받는 것도 하나의 동기 부여가 된다. 철저한 실무형인 김헌기의 수사 인생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어 후배 경찰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김 1부장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노력한 수사관들이 많아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응했다"며 "후배들이 국민만 바라보고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수사를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1부장은 "수사권 조정이 이뤄졌으나 시작에 불과하다"며 "경찰이나 검찰이나 모두 국민을 위해 있는 수사기관이기 때문에 건전한 경쟁관계가 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민 기대 수준을 볼 때 경찰이 앞으로 갖춰야 할 게 너무 많다"며 "신뢰는 실력에서, 역량은 권한에서 나온다. 권한이 주어진 만큼 실력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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