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절경 대협곡 가는 길...역사는 지워지고 소설 삼국지만 남았다

이전기사

구독이 추가 되었습니다.

구독이 취소 되었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천하절경 대협곡 가는 길...역사는 지워지고 소설 삼국지만 남았다

입력
2020.07.18 10:00
0 0


<44>후베이 ④우산 싼샤ㆍ펑제 백제성ㆍ언스대협곡

언스대협곡 대지산천의 옥필봉. 아슬아슬하게 곧추선 바위 봉우리에 소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붓에 비유한 이름이다.


펑제(奉節)로 가는 유람선을 탄다. 행정구역상 충칭시다. 우산(巫山)에서 뱃길로 2시간30분이 걸린다. 운무로 뒤덮인 산세가 드높다. 서서히 싼샤의 마지막 협곡인 취탕샤(瞿塘峽)로 접어든다. ‘험준하기로는 검각(劍閣)에 미치지 못하고 웅장하기로는 기문(夔門)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둘 다 고대에 촉나라 땅으로 들어가는 요새를 의미한다. 취탕샤의 별칭이기도 하다.

백제성, 공손술은 어디 가고 제갈량이 행세하나



장강삼협의 마지막 협곡인 취탕샤 부근 산자락에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다.


고대 촉나라의 북쪽 관문인 검문관.

검각에 있는 검문관은 이백이 ‘촉도난(蜀道難)’에서 ‘한 명이 지켜도 만 명이 뚫지 못한다’고 표현한 촉의 북쪽 관문이다. 두보는 말년에 동쪽 관문인 기문에 머물렀다. ‘기주가(夔州歌)’에서 백뢰관(百牢關)에 비유하고 기문을 통과하느라 죽을 뻔했다고 노래했다. 이렇듯 험악한 뱃길을 따라 유비는 기문을 지나 동진해 이릉에 이르러 오나라와 전투를 벌였다. 참패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절경으로 손색이 없어 10위안 지폐 뒷면을 차지하고 있다.

촉나라의 동쪽 관문인 기문.

취탕샤 남쪽 절벽에 석각이 보인다. 거대한 서예 전시관이다. 황제에 대한 공덕을 칭송하고 기문의 경치에 찬사가 가득하다. 배를 타고 지나가면 제대로 다 보기 힘들어 다소 아쉽다. 그나마 붉고 큰 글씨는 해독이 가능하다. 가장 오래된 석각은 1171년 남송의 서예가 조공석의 황송중흥성덕송(皇宋中興聖德頌) 비문이다. 남송의 고종이 효종에게 선양한 미덕을 찬송한 내용으로 모두 948자에 이른다. 유려한 필체의 아름다운 보물로 댐 수위가 상승해 현재 충칭에 있는 싼샤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취탕샤 바위 절벽의 석각. 거대한 서예 박물관이다.

강물 위 푸른 나무에 살짝 가려진 외재기협(巍哉夔峽)은 ‘우뚝 솟은 기문 협곡’에 대한 감탄이다. 1930년 말 항일투쟁 당시 국민당 군대의 참모장인 리돤하오의 솜씨다. 바로 옆에 사단장인 쑨위엔량의 서체도 보인다. 기문천하웅(夔門天下雄), ‘천하의 웅장한 관문인 기문’을 함기경경과(艦機輕輕過), ‘군함이 재빠르게 지나가리라’라는 결의다. 당시 장제스는 충칭으로 도읍을 옮겨 항일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취탕샤 바위 절벽의 '개벽기공' 석각.

바로 옆에 보일 듯 말 듯 흐릿한데, 자세히 보면 개벽기공(開闢奇功)이 새겨져 있다. ‘개척한 공로’라는 뜻이다. 이 절의 석각을 따라 잔도를 만든 사람에 대한 칭찬이다. 사진을 찍고 확대해서 보니 앞쪽에는 청나라 광서제 15년(1889)에 기군(夔郡) 태수가 잔도를 개척한 공적을 치하한다는 글자가 있다. 쓰촨 총독이 황제에게 표창을 진언했다. 뒤쪽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예가인 류문수가 썼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로 잔도로 가면 석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데 배를 탔으니 그림의 떡이다.

명필의 서예 전시관으로 소문이 자자한 석각이다. 청나라 말기와 민국시대에 활동한 서예가인 류심원과 장백상의 ‘기문(夔門)’과 ‘구당(瞿塘)’이 수작이라는 평가다. 민국시대 서북 군벌인 펑위샹도 답출기무타주왜구(踏出夔巫打走倭寇)라는 글자를 남겼다. ‘취탕샤와 우샤를 벗어나 왜구를 타도하러 간다’는 뜻이다. 모두 잔도 덕분에 만들어진 석각이다. 배를 버리고 헤엄쳐 가기도 어렵고 한탄스러울 뿐이다.

취탕샤를 지나며 본 백제성. 붉은 강물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기주고성. 유비가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부탁했다는 '탁고' 고사가 전해지는 곳이다.

취탕샤를 벗어나 펑제에 거의 다다르자 장강에 작은 섬 하나가 등장한다. 삼국지 역사에 등장하는 백제성(白帝城)이다. 육지에서 섬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보인다. 차오텐먼(朝天門) 부두에서 내리면 바로 기주고성(冀州古城)이다.

이릉 전투에서 패배한 유비는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수도 청두에 있는 제갈량을 불렀다. 정치적으로 뜻을 달리하고 행정 능력이 탁월한 제갈량은 이릉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아들 유선을 맡기는 탁고(託孤)의 고사가 전해지는 장소다. 유비는 기주성 영안궁에서 유언을 남겼다. 정치적 비전이 달랐던 제갈량이 아들을 살해하고 한나라의 부흥을 도모할 것을 염려했다. 소설 삼국지는 이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유선이 제왕의 그릇이 아니라면 그대가 취하라’라고 했다. 제갈량이 모반을 하긴 어려웠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시성(詩城)이라 불리는 기주고성 앞 시인 조각상.


백제성의 제갈량 동상과 출사표 비문.

시인이라면 펑제의 옛 지명인 기주에 한번쯤 다녀갔다. 그래서 시성(詩城)이라 불린다. 이백, 두보, 유우석, 백거이, 이하, 소식, 소철, 왕유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이 찾았다. 강변 도로로 약 5분을 가면 백제성 입구에 도착한다. 400m에 이르는 다리를 건너면 충의광장이다. 청동으로 주조된 높이 5m의 제갈량이 수염과 옷깃을 휘날리며 서 있다. 뒤에는 순백의 한백옥(漢白玉)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제갈량은 두 번의 출사표를 쓴다. 앞에는 227년의 ‘전출사표’, 뒤에는 228년의 ‘후출사표’가 새겨져 있다.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잔도를 따라 가다가 살짝 오르막을 오른다.

공손술의 무덤인 백제묘 대문.

장강의 섬에 누가 이렇게 아담한 성을 쌓았을까? 서한과 동한의 과도기에 쓰촨을 할거하던 공손술이다.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을 지지했다가, 녹림과 적미의 민란으로 혼란한 정세를 틈타 국호를 성(成)이라 하고 황제가 됐다. 난세의 영웅 광무제 유수는 동한을 개국한 후 민란과 전쟁으로 피로한 나라를 안정시킨다. 공손술 세력은 안중에도 없었다. 제멋대로 하도록 도외시한다는 고사인 ‘치지도외(置之度外)’는 공손술에 대한 최악의 평가다. 10년 후 동한의 대사마 오한이 군사를 이끌고 일시에 백제성을 함락시켰다. 백제성 남쪽에 공손술 무덤인 백제묘가 있다.

백제묘의 탁고당 외부 모습. 얼핏 유비의 모습이 보인다.


백제묘의 탁고당 내부에 유선이 유언을 듣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탁고당이 나온다. 앞서 언급했듯 유비의 탁고는 백제묘가 아닌 기주성에서 있었다. 백제묘에 주인인 공손술의 자취는 사라졌다. 비가 좀 세게 내리기 시작한다. 탁고당 바깥에서 얼핏 보이는 유비의 모습이 처량해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니 유선이 고개를 들고 유언을 듣고 있다. 부채를 들고 있는 제갈량은 비장하다. 조운이 눈을 부릅뜨고 또 한 명의 탁고 신하인 이엄을 바라보고 있다.

백제묘의 명량전. 백성들이 황제 공손술을 위해 세웠다.

백제성에 백학정(白鶴井)이 있었는데 운무가 피어나는 모습이 한 마리 학이 날아오르는 듯 했다. 공손술은 백룡이 솟아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황제가 되고 백제라 했다. 수도는 청두였지만 백제성 인근 지방은 전쟁도 없고 평온했다. 온건한 황제 공손술이 사망하자 백성은 묘원을 짓고 명량전(明良殿)을 세워 참배했다.

명나라 정덕제 시대에 공손술의 모습이 사라졌다. 가정제 시대에는 유비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나중에 제갈량, 관우, 장비가 차례로 등장한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삼번의 난을 토벌한 총독 채육영은 사당을 중건하며 한대명량(漢代明良)이라는 칭찬을 남겼다. 문무를 겸비한 장수의 서체로 명품 편액의 반열에 드는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아래에 있는 우보신풍(羽葆神風)은 청나라 건륭제 시대 시인이자 서예가인 오석린의 시로 유비의 고향인 ‘누상촌(樓桑村)’에 나오는 말이다. 마차의 덮개인 우보를 타고 풍운아로 살았다는 뜻이다.

백제산의 백제성. 공손술이 혼란을 틈타 스스로 황제가 된 곳이다.

명량전 동서 양쪽에 비림(碑林)이 있다. 시인의 감성이 녹아있는 장소다. 왼쪽으로 제갈량 사당 무후사가 있고 연못도 있다. 시인의 조각상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당시(唐詩)나 서체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좋아할 장소다. 가랑비가 내리는 백제성을 산보하며 천천히 도도히 흐르는 장강을 바라본다. 다리를 건너 되돌아오는데 백제성 뒤로 운무가 가득 펼쳐져 있다. 백룡이 되고 싶어 했던 공손술은 백제성 백성에게 인기가 많은 황제였던 듯하다. 전란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비록 패배했지만 백성은 그의 공덕을 기리며 묘원과 사당을 짓고 경배했다. 공손술의 역사는 사라지고 삼국지 소설이 자리를 차지한 백제성, 이백의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이나 읊으며 떠나려 한다.

아침 일찍 아름다운 구름에 싸인 백제성을 떠나(朝辭白帝彩雲間)

천리나 되는 강릉까지 하루 만에 돌아왔네(千里江陵一日還)

강 기슭 양쪽에 원숭이 울음 그치지 않고(兩岸猿聲啼不住)

날렵한 배를 타고 첩첩이 이어진 산을 지나왔네(輕舟已過萬重山)

붓인가, 횃불인가...장엄하고 섬세한 언스대협곡

후베이성 언스대협곡 바위산이 운무에 휩싸여 있다.

펑제에서 242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간다. 협곡을 가린 운무에 휩싸인 풍광이 계속 따라온다. 오락가락 비가 내리니 도로 옆 계곡물이 앞다퉈 빠르게 흐른다. 차량이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지만 서행을 한다. 아마도 산소 농도가 가장 풍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상쾌한 길이다. 충칭 싱룽진(興隆鎮)을 지나 후베이 반챠오진(板橋鎮)으로 접어든다. 3시간30분 걸려 후베이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언스투자족먀오족자치주(恩施土家族苗族自治州)에 위치한 대협곡에 도착했다. 대협곡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호텔에 도착해 창문을 여니 장관이 펼쳐진다.

후베이성 서쪽 끝자락에 있는 언스대협곡 입구.


언스대협곡의 칠성채 케이블카.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다시 창문을 여니 어느새 운무는 사라지고 청명한 날씨다. 입구에서 버스로 산자락을 타고 오른다. 다시 칠성채(七星寨)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탄다. 길이는 2,284m이고 고도 차이는 792m다. 봉우리를 향해 가파르게 오르면서도 주변이 확 트여서 사방을 느릿느릿 충분히 관망할 수 있다. 절벽을 따라 만든 등산로는 생각보다 안전하다. 편안하게 걷기 참 좋은 길이다. 중루문(中樓門)을 지나 대루문(大樓門)으로 간다.

언스대협곡 상운화거. 횃불 모양 암석.


언스대협곡의 영객송. 손님을 맞이하는 소나무다.


언스대협곡에서 바라본 청강.

봉우리 사이를 지나 꼬불꼬불 걷다가 산 아래가 훤히 보이는 관망대도 나타난다. 잔도를 따라 계속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독특한 이름이 붙은 기암괴석과 만난다. 절벽에 걸린 듯한 모습의 상운화거(祥雲火炬)다. 암석이 횃불이라 살짝 미소 짓는다. 불 대신에 구름이 오르면 더 멋질 듯하다. 약 2억5,000만년 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 생성돼 풍화와 침식을 거쳐 쭉 뻗은 모양으로 남았다. 조금 지나니 절벽에 소나무 한 그루가 매달렸다. 황산에 있는 소나무와 이름이 같은 영객송(迎客松)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며 굳건하게 서 있다. 암석 사이로 보이는 강은 언스를 흐르는 청강(清江)의 지류다.

언스대협곡 일주향 앞에서 한 여성이 합장하고 있다.


일주향 바위 꼭대기에 소나무가 그림처럼 매달려 있다.

언스대협곡의 상징은 일주향(一炷香)이다. 협곡에서 솟아난 듯 보이며 높이가 150m에 이르는 돌기둥이다. 대략 4m 정도의 지름으로 곧추서 있다. 사찰이나 도관에서 피우는 향불처럼 생겼다. 마침 일주향 가까이서 두 손을 모으고 기원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 폭이 좁고 어두운 협곡에서 보니 향과 사람의 실루엣이 금상첨화다. 카메라 렌즈로 일주향 꼭대기를 클로즈업해 보니 틈새에 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꼿꼿하게 수직으로 억겁의 세월을 견디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 사람들에게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언스대협곡의 대지산천. 바위 봉우리가 '천(川)'자 모양으로 모여 있다.


언스대협곡의 대지산천 중 옥필봉.


언스대협곡의 대지산천 중 옥녀봉.


언스대협곡의 모자정심 바위.

이제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대지산천(大地山川)을 지나면 천(川) 자를 형성한 봉우리가 모여 있다. 넓게 펼쳐진 옥병봉(玉屏峰)과 옥녀봉(玉女峰), 옥필봉(玉筆峰)이 나란하다. 가장 바깥 쪽의 옥필봉은 마치 붓걸이에 두 자루의 붓이 걸려 있는 모습이다. 옥녀봉 꼭대기는 옥녀가 멀리 하늘을 바라보는 형상이라는데 그럴듯하다. 정말 재미있는 의인화는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면 보인다. 어머니가 아들을 꼭 껴안고 있는 모자정심(母子情深)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머니에 대한 정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아래에서 바라본 언스대협곡 바위 봉우리.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가 지루하다 싶었는데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생각보다 빠르게 내려온다. 출구에서 올려다본 대협곡도 장관이다. 위에서 볼 때와 또 다른 맛이다. 수백km에 이르는 카르스트 협곡이다. 개방된 일부 구간만으로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언스대협곡은 산 위의 칠성채와 산 아래 운용지봉(雲龍地縫)으로 나뉜다.

위에서 내려다 본 운용지봉과 비룡폭포.


비룡폭포가 떨어지는 곳의 검고 붉은 바위.


아래에서 본 운용지봉의 폭포.

버스를 타고 이동해 운용지봉으로 간다. 지봉은 땅이 푹 꺼져서 형성된 공간으로 카르스트 지형이기에 가능하다. 유(U) 자형의 골짜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다리에서 바라보니 생각보다 엄청 깊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골짜기로 쏟아지는 비룡폭포가 굉음을 낸다. 안으로 들어서서 폭포 앞 잔도에 서니 폭포수가 옷을 적실 정도로 날아오른다. 폭포를 온몸으로 막고 있는 바위는 왜 그런지 윗부분이 새까맣다. 온통 까만 색이었다가 조금씩 옷을 벗은 듯 붉은 빛을 드러내는 지도 모르겠다.

운용지봉의 초록 나뭇잎이 붉은 암벽과 대조를 이룬다.

햇볕이 거의 차단된 골짜기에 물도 많아서 나뭇잎이 진한 초록을 뽐내고 있다. 계곡에 덕지덕지 붙은 흙을 뚫고 사방에 자라나는 풀이 많다. 드문드문 이름 모를 꽃도 폈다. 산 위에서 흘린 땀이 다 씻겨 나간다. 서늘한 기운은 원시 자연의 느낌인 지도 모른다. 대협곡에 왔으니 ‘대지봉’이라 해야겠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엣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