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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직장 내 성희롱 소송' 승소 이끌었던 그가...

입력
2020.07.14 09:00
수정
2020.07.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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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시장의 죽음, 생전 '인권 변호사' 평가와 충돌

1998년 2월 11일 한국일보 지면. 자료조사=박서영 데이터분석가

1998년 2월 11일 한국일보 지면. 자료조사=박서영 데이터분석가


1994년 이날,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의 항소심 첫 공판이 열렸습니다. 4년 후 대법원은 국내 최초 '직장 내 성희롱 소송'에서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6년 동안 피말리는 법정 공방을 통해 피의자 유죄를 이끌어 낸 12명의 공동변호인단 중 한 명은 정작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자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해당 고소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습니다. 이에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누군가 용기를 내어 문제를 제기했지만 수사를 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목숨을 끊기 전날(8일) 전직 비서를 성추행했다는 이른바 '미투 의혹'으로 형사 고소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은 그동안 '여성ㆍ인권 변호사'로 불려왔습니다. 한국일보는 박 시장의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해명 대신 죽음을 선택한 박 시장의 결정이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과 어떻게 상충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국내 최초 '직장 내 성희롱' 인정한 '서울대 신 교수 사건' 변호

박 시장이 '페미니스트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게 된 대표 사건은 '서울대 신 교수 사건'입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 실험실에서 조교로 근무하던 우모씨는 "1992년 5월 29일부터 1993년 8월까지 같은 과 신모 교수가 수차례 뒤에서 껴안는 듯한 자세를 하거나 손과 어깨를 어루만지고 산책 등을 요구,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며 1993년 10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당시 1심은 "신 교수는 우씨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양측은 항소심을 신청했습니다. 신 교수 측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였고, 우씨 측은 대학 당국과 대한민국에 대한 유죄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취지에서였습니다.

하지만 2심은 "가벼운 신체 접촉은 성적 행위가 아니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가 "업무 수행상 가벼운 신체 접촉이어서 악의 있는 성적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에 불복한 우씨는 대법원에 상고, 상고장에서 "남성 위주의 시각에서 사실 관계를 해석함으로써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1998년 2월 10일, 국내 첫 성희롱 사건 재판에서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습니다. 처음으로 성희롱에 대한 사법적 책임이 인정되고 유사사건의 법적 판단기준이 마련된 것입니다. 당시 재판부는 "비록 일시적이었다고 해도 피고의 행위는 집요하고 계속적이어서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단순 농담이나 호의적 언동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서울대 조교 성희롱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발표, "대법원 판결은 성희롱을 불법 행위로 인정함으로써 남성 중심 성문화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환영했습니다.

당시 박 시장은 이 역사적 재판의 공동변호인단 중 한 명으로 참여했습니다. 박 시장은 이후에도 "'우 조교 사건'이 아니라 '신 교수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며 인식 전환을 촉구했습니다. 2001년에는 "남성 직장인들이 '내 행동이 성희롱은 아닌가'라는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직장 문화가 바뀌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2016년 9월에 자신의 저서인 '세기의 재판'의 북토크에서는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재판은 '우 조교 사건'"이라며 "(이 사건은) 우리 시대에 양성 평등을 바로잡을 기회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직장에서 여성이 차 심부름하고 술자리에서 접대시키는 경향이 있었다"며 "술 심부름에 포옹은 허다했다"고 꼬집었습니다.


'6월 항쟁' 기폭제 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호

박 시장이 여성과 관련한 굵직한 사건을 변호한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닙니다. 1986년 6월,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취업한 서울대 학생 권인숙씨(더불어민주당 의원)가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에게 성고문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해 7월 권씨는 문씨를 강제추행죄로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이튿날 문씨는 오히려 권씨를 명예훼손죄로 맞고소했죠.

같은 달 검찰은 성고문에 대해 '혐의 없음' 결정을 내리고 폭언과 폭행 부분만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그나마 문귀동의 공로를 인정해 처벌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기소유예처분을 했습니다. 이듬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변호인단은 1988년 1월 재정신청 조속 처리 촉구 서한을 대법원에 냈습니다.

결국 이듬해 문씨는 징역 5년과 위자료 지급을 선고 받고 감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박 시장은 이 때에도 고(故) 조영래 변호사 등 8명의 변호사와 함께 권씨를 돕게 되었죠. 이 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 시장 고소인 측은 13일 "범행 장소는 시장 집무실과 침대"였다며 직장 내에서 발생한 범행이었음을 밝혔고, "범행 발생 기간은 4년"이라며 '피고의 행위가 집요하고 계속적'이었음을 알렸습니다. 또 "박 시장이 집무실 안에 있는 침실로 고소인을 불러 포옹을 요구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앞서 박 시장이 "직장에서 포옹은 허다했다"며 '직장 내 성문화'를 비판한 것과 엇갈리는 대목입니다.

손성원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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