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냐 욕망이냐…‘엘레나 선생님’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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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냐 욕망이냐…‘엘레나 선생님’의 질문

입력
2020.07.12 18:15
수정
2020.07.1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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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구 시대의 몰락과 새 시대의 몰염치를 그리며 우리 시대의 가치 기준은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엠컬처 제공

"딩동!" 늦은 저녁, 초인종이 울린다. 혼자 사는 집에 딱히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 문을 다 열 새도 없이 불쑥 들어오는 케이크와 선물. 고등학교 수학교사 엘레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제자들이다. 엘레나는 아이들의 깜짝 방문이 당황스럽지만 내심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연극이 사제지간의 훈훈한 정을 다루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눈치 채긴 어렵지 않다.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이라는 제목이 반어법이란 것도. 

아이들은 이제 대놓고 본색을 드러낸다.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좋은 성적이 필요하니 수학 시험지를 보관한 금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엘레나가 단호하게 훈계하자 아이들은 "뭐든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냐" "선생님이 범죄를 자극하고 있다"며 회유와 협박을 늘어놓는다. 직접 열쇠를 찾겠다면서 집안을 헤집어 놓기까지 한다. 

엘레나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정직과 진실, 정의와 양심의 가치를 설파한다. 아이들은 비릿한 웃음으로 응수한다. "우리 시대엔 잘 살려면 비열해야 해요." 완고한 엘레나와 집요한 아이들 간 대치 상황은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다.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아이엠컬처 제공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구소련 시절 작가 류드밀라 라주몹스까야가 정부 의뢰로 쓴 청소년 극이다. 하지만 1981년 초연 직후 혼란스러운 이데올로기를 그린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됐고, 1987년이 돼서야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의 개방정책에 따라 해금됐다. 

무려 40년 전 작품이지만 극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엘레나가 당한 수모, 무너진 권위는 구 시대의 몰락을 상징한다. 사회 규범이자 시대 정신이었던 도덕과 윤리는 이제 수명을 다하고, 그 자리는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의 욕망으로 채워진다. 새 시대의 출범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방식이 매우 폭력적이며 몰염치하다.  

아이들 중 우두머리 격인 발로쟈는 특히 문제적 캐릭터다. 성적이 우수해서 답안지 조작이 필요없는데도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추동한다. 자신의 권력을 시험하고 과시하기 위해서다. 기득권층, 엘리트층의 추악한 본성에 공포심까지 밀려온다.  

다급해진 아이들은 패륜도 서슴지 않는다. 객석에선 분노 어린 한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태연하게 항변한다. "도덕은 극히 인간적 카테고리예요. 그래서 상대적이고요."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라는 삼단논법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수시로 목격했기에, "비열함도 신념"이라는 아이들의 궤변을 비난하기 어렵다. 도덕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개인의 이익과 양심 중 무엇이 우선인가, 지금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은 무엇인가. 극중 인물들의 팽팽한 논쟁이 관객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무대를 가운데 두고 양쪽의 객석이 서로 마주보는 극장 구조도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이끄는 주요한 장치다. 

아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금고 열쇠였을까, 엘레나의 도덕적 추락이었을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파멸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대학로에서 가장 주가가 높은 김태형 연출이 밀도 있는 극을 완성해 냈다. 원작을 각색한 오인하 작가는 "이 작품을 본 관객들이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생각해 보고 그 답에 대해서 '여전히'가 아닌 '이제는'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9월 6일까지 서울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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