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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이름으로 아무나 위로할 때

입력
2020.07.08 04:30
수정
2020.07.09 09:4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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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완전 끝났지." "절대 아닐 걸." "말이 돼?" "여기 대한민국이야." "설마!"

지난 봄 지인과 나눈 대화다. 40년 넘게 겪고도 나는 역시나 대한민국을 몰랐다.

충남도지사 시절 안희정은 비서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했다. 지난해 유죄 확정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는 중에 모친상을 당했다. '인간 된 도리를 하라'며 검찰이 닷새의 특별 휴가를 내줬다.

안희정은 '인간 됨'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여전히 힘을 누리고 싶어했다. 코로나 시대의 예법인 조용한 장례를 거부했다. 그는 사양을 몰랐다. 힘센 조문객, 힘센 이름이 보낸 조화가 빈소에 넘쳐났다. 언론 취재도 막지 않았다.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차린 빈소는 '안희정 권력의 쇼룸'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나 안희정은 이렇게 살아 있다."

전ㆍ현직 국무총리부터 국회의원, 장관까지, 당대의 권력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줄줄이 나타났다. 안희정의 손을 어루만지고,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그들이 가진 현재 권력의 총합은 안희정의 재기 가능성과 정비례한다. 빈소의 수선함은 참담한 사실을 가리킨다. '정치인 안희정의 미래는 꺼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잠시 유예됐을 뿐.'

수척해진 안희정의 얼굴이 화제에 오르는 동안, 그가 유린한 김지은의 고통은 아무도 떠올리지 않았다. 빈소는 폭력적인 애도를 나누는 그들만의 무대였다. 그 한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弔花)가 놓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산업재해에 살해당한 노동자와,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와, 나라에 목숨 바친 순직 소방관의 빈소를 지킨 바로 그 조화다.

어머니를 잃는 건 찢기는 아픔이다. '대통령이 될 아들'에서 '강간범 아들'로 추락한 채 어머니와 작별한 안희정의 마음도 찢어지고 있을 것이다. 안희정이 자초한 슬픈 비극이다. '자연인 문재인'이 그 슬픔을 나누는 건 자유다. 아름답다고 할 순 없겠지만, 위법도, 부도덕도 아니다. '대통령 문재인'에겐 결단코 그럴 자유가 없다.

대통령의 모든 메시지는 통치다. 애도 역시 통치 행위다. 정적(政敵)에게 보내는 대통령의 애도는 화합이다. 약자들에게 전하는 애도는 더 나은 세상에의 약속이다. 위대한 사상가에게 바치는 애도는 경의이며, 국가가 지키지 못한 국민을 기리는 애도는 뼈 아픈 참회다. '대통령'의 이름으로 안희정을 애도해 문 대통령이 말하고자 한 바는 과연 무엇인가.

대법원은 안희정에 3년 6개월의 실형을 내렸다. 사법부 성폭력 양형이 물러터진 걸 감안하면, 그는 국가가 공인한 중범죄자다. '모두의 인권이 소중한 나라'인 덕에 형 집행이 잠시 중지됐을 뿐, 그가 성폭력범이라는 명백한 사실까지 보류된 건 아니다.

그런 안희정을 향한 대통령의 사사로운 애도에 성폭력 가해자들은 조용히 웃었을 테다. 언제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약자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가해자의 위력에 짓눌려 입 닫고 사는 김지은들의 세상은 또 한번 무너지고 있을 것이다. "저한테 제일 두려운 것은 안희정 지사입니다." 미투 첫날 방송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김지은의 말은 얼얼한 진실이었다. '존재하지만 행사되지는 않았다'던 안희정의 위력은 구치소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대통령 열성 지지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안희정이 아닌 어머니에게 보낸 조화다. 뭐가 문제냐." 조두순이 모친상을 당한대도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야 마땅한가. "대통령이 너무나 사람다워서 조화를 보냈다." 그 '사람'의 범주에 피해자는 왜 끼워주지 않는 건가. 허약한 궤변은 대통령을 지키지 못한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법제도가 성폭력 가해자 편이라는 사실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여성들은 절규한다. 대통령이 안희정에게 조화를 보낸 2020년 7월 6일, 대한민국 여성들에겐 대통령도 없었다.  


최문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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