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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역사적으로 일본의 다케시마는 오래되었고, 한국의 독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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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역사적으로 일본의 다케시마는 오래되었고, 한국의 독도는 없었다”?

입력
2020.07.0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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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영토권원을 바탕으로 오늘날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관할통치하고 있는 고유영토이다. 그런데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오히려 일본이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사실을 날조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일본국이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의 존재를 옛날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改正日本輿地路程全?)’(1779년 초판)등 각종 지도나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라고 하여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도 일본이 먼저 발견하였다고 주장한다. “한국이 예로부터 다케시마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라고 하여 한국의 관찬 고문헌의 증거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고시 40호로 국제법에 따라 독도가 무주지(無主地)라서 선점하여 일본영토가 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1905년 이전에 한국영토로서의 증거를 모두 부정해야 했기 때문에 억지주장을 펼 수밖에 없다. 

 첫째, ‘삼국사기’에 대해, 일본은 “우산국이었던 울릉도가 512년 신라에 귀속되었다는 기술은 있지만 ‘우산도’에 관한 언급은 없다”라고 하여 독도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독도의 영유권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역사는 정황증거로 추량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고고학에 의한 역사는 대부분 추량이다. 일본은 신화를 바탕으로 712년의 고지키, 720년의 일본서기에서 BC 660년에 건국되었다고 일본역사를 기록했다. 독도는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바위섬이고 울릉도에서 바라다 보이기 때문에 울릉도 사람들이 어장으로 활용하였다고 추량된다. 만일 삼국사기에 “울릉도에 우산국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없었다면, 울릉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독도의 역사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태종실록’(1417년)에 대해, 일본은 “조선의 태종실록에 나와 있는 ‘우산도’에 관한 기술을 보면 “우산무릉등처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데리고 나왔는데, 그 섬의 호수는 15가구, 남녀 86명이었다” 등 다케시마의 실상과는 맞지 않는 점들이 있어 오히려 울릉도를 상기시키는 내용이다“라고 하여 우산도와 울릉도가 동일한 섬이라고 주장한다. 김인우가 “우산무릉등처”안무사이었기에 분명히 우산도와 무릉(울릉)도는 별개의 섬이다. 세종실록(1454년)에도 동해의 “우산도, 울릉도 두 섬은 날씨가 맑으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라고 하여 두 섬 간의 거리를 정확히 기술하여 ‘우산도,울릉도’가 2개의 섬임을 명확히 했다. 지금의 독도는 원래 명칭이 없었는데, 1417년경 처음으로 우산도라고 명명되었다.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왔다”고 말했던 것은 “우산,무릉(울릉)등처안무사”로서 ‘우산,울릉’ 순으로 섬이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맨 먼저 도달한 섬이기에 ‘우산도에서 돌아왔다’라고 했던 것에 불과하다. 분명히 1417년의 ‘우산무릉등처안무사’, 1454년의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우산도와 울릉도’는 별개의 두 섬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1693년 안용복사건으로 울릉도와 우산도의 존재와 위치가 명확히 확인된 이후에는 ‘동국문헌비고’(1770년)에서는 김인우가 사람을 데리고 돌어온 섬이 ‘우산도’가 아니고 울릉도였음을 수정했다. 

 셋째,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에 대해, 일본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첨부된 팔도총도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별개의 2개 섬으로 그려져 있지만 ‘우산도’는 울릉도와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으며, 더욱이 한반도와 울릉도 사이(울릉도의 서쪽)에 위치하는 점 등으로 보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섬”이라고 하여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섬이라고 하였다. 1531년의 ‘신증 동국여지승람’은 1417년의 ‘태종실록’, 1454년의 ‘세종실록 지리지’를 그대로 답습하여 ‘팔도총도’에 ‘우산도,울릉도’ 순으로 두 섬의 존재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독도에 해당하는 우산도에 대한 오류는 1403년부터 1881년까지 쇄환정책으로 울릉도에 사람의 거주를 금하여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이전 신라의 우산국, 고려의 우산성 시기에는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2개의 섬으로써 울릉도는 물론이고 독도에 대한 정보도 정확했다. 그래서 ‘2개의 섬’이라는 정보가 태종실록,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을 거쳐 후세에 정확히 전해졌던 것이다. 특히 태종 때는 무인도인 독도에 대해 ‘우산도’라는 명칭을 정하고 지리지에 ‘우산도, 울릉도’ 2섬을 표기하여 영토의식을 명확히 했다. 

넷째, '동국문헌비고'계통에 대해, 일본은 “한국측은 ‘동국문헌비고’(1770년) ‘만기요람’(1808년) ‘증보문헌비고’(1908년)에 여지지(輿地志)를 인용하여 ‘우산도는 일본이 말하는 마쓰시마이다’라고 기술되어 있어, 우산도가 독도(다케시마의 한국명)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지지’ 본래의 기술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동일한 섬이라고 되어 있으며, ‘동국문헌비고’ 등의 기술은 안용복이라는 인물의 신빙성이 낮은 진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또 다른 문헌 강계고(彊界考)(1756년)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하여 울릉도와 우산도가 동일한 섬이라고 했다.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라고 하는 명명백백한 고문헌 기록조차도 비과학적인 논리로 ‘신빙성이 없다’고 하여 사실을 날조했다. 1693년 안용복사건 때 안용복에 의해 울릉도의 쇄환정책으로 정보가 부족하여 막연했던 ‘우산도 울릉도’ 2개의 섬 존재를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그 이후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 1808년의 ‘만기요람’, 1908년의 ‘증보문헌비고’까지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임을 명확히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우산도는 지금의 독도가 아니고 울릉도와 동일한 섬이거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섬이라고 우긴다.



최장근 대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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