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탠포드대, 근로자 건강 영향 연구 보고서
대기업은 여가 늘고, 중기-비정규직 진료 잦아져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삶의 질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신규 채용이 비정규직 위주로 이뤄지면서 숙련 근로자에게 일이 몰리는 부작용도 관찰됐다. 주 52시간제는 2017년 7월 도입돼 현재 공공기관과 300인 이상 대기업에 적용되고 있다.
5일 학계에 따르면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아시아 건강정책 프로그램’은 한국의 주 52시간 도입이 근로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연구 보고서를 최근 발간했다. 박성철 미국 드렉셀 대학 보건학부 교수와 고한수 박사가 쓴 이 보고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 특례 업종 여부 등 다양한 근로 조건하에서 주 52시간제가 근로자 건강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분석했다.
연구진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패널조사인 ‘한국복지패널’ 참여자 1,862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주 52시간제 도입 전인 2014~2017년과 도입 후인 2019년을 비교했다.
여가비, 대기업 직원 13만원 늘 때 비정규직은 변화 없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 52시간제 도입이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의 삶의 질을 높인 건 확실해 보인다. 3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는 여가비 지출이 월 12만8,690원 늘어났다. 퇴근 시간이 빨라져 여가를 즐길 여유가 늘었다는 방증이다. 반면 주 52시간제 규제를 받지 않는 중소기업(300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의 여가비 증가폭은 대기업의 절반 수준(6만5,830원)에 머물렀다. 비정규직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여가비에 큰 변화가 없었다.
주 52시간제 수혜를 받지 못한 근로자는 병원 이용이 증가했다. 중소기업 정규직은 연간 외래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는 횟수가 2.7회 증가했고,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3.6회나 늘었다. 반면 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주 52시간제 전후로 외래 진료 이용에 큰 변화가 없었다. 의료비(건강보험 본인부담금) 지출을 봐도, 중소기업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주 52시간 도입 이전보다 각각 6만830원, 5만800원 증가했다. 이는 대기업 정규직의 의료비 증가폭인 4만1,480원을 웃돈다.
육상ㆍ수상ㆍ항공운송업과 기타 운송 관련 서비스업, 보건업 등 5개 업종은 주 52시간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 ‘특례 업종’이다. 조사 대상 가운데 이런 특례 업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을 살펴본 결과 주 52시간제 도입 전보다 만성질환에 걸린 비율이 57.3%포인트나 올랐고, 의료비 지출 역시 월 10만1,660원 증가했다. 이들은 삶의 만족도(최하 1점~최대 5점)가 주 52시간제 도입 이전보다 약 1.3점 낮아졌다. 비특례 업종 비정규직의 만족도가 0.1점 오른 것과 대조적이다.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주 52시간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중소기업이나 특례 업종 종사자는 삶의 질이 이전보다 낮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박성철 교수는 “주 52시간제라는 노동시장의 거대한 변화가 기존의 근로자들간 격차를 더 벌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규 채용은 비정규직 위주...고참에 일 몰리기도
연구진은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이후 신규 채용 특징도 들여다봤다. 신규 취업자 중 정규직이 16.8%포인트 증가하는 동안 비정규직은 43.1%포인트나 늘어났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일손 부족을 주로 비정규직으로 채웠다는 뜻이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신규 채용을 하더라도 ‘신참’은 숙련도가 떨어져 '고참'인 숙련 근로자에게 일이 몰리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주 52시간 초과 근로자의 평균 근속 연수가 8년으로, 주 52시간 이내 근로자(0.5년)보다 훨씬 긴 것이 이를 보여준다. 박 교수는 “주 52시간 도입으로 발생한 의도치 않은 결과로부터 근로자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보완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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