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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카롤 베파가 쓴 에튀드 '임주희'를 들려드립니다

입력
2020.07.06 04:30
수정
2020.07.16 15:08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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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클래식 거장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정명훈이 선택한 신예 피아니스트 임주희가 격주 월요일자로 '한국일보'에 음악 일기를 게재합니다.

카롤 베파와 임주희(왼쪽). 임주희 제공

카롤 베파와 임주희(왼쪽). 임주희 제공


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임주희가 연주하는 임주희'라는 독주회를 연다. 임주희가 임주희를 연주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 설명을 위해선 2011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12살이었던 나는 프랑스 안시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연주를 하게 되었다. 원래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하기로 돼 있었다. 공연 전 안시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이자 러시아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인 데니스 마추예프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난해에 내게 헌정된 곡이 하나 있는데 아직 연주를 못 했다"며 나더러 대신 연주해달라고 물었다.

공연까지 불과 3주 남았을 때라 당황스러웠다. 문제는 촉박한 시간만이 아니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마추예프는 키 193㎝의 거구에다 파워풀한 연주를 자랑한다. 오죽하면 별명이 '천둥'이겠는가. 손 크기만 해도 나보다 2배는 더 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위해 작곡한 곡을, 12살 꼬마 여자아이에게 연주해보라니. 엄청난 테크닉과 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악보를 보기도 전에 지레 겁이 났다. 한편으론 오기도 생겼다. 대체 어떤 곡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일단 ‘예스’라고 답한 뒤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주변에선 "현대곡은 아는 사람이 없을테니 연주하다 설사 좀 틀려도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는 응원 아닌 응원(?)을 해줬다. 그도 그럴것이 마추예프 본인도 연주해본 적 없으니 그 곡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작곡가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나는 3주 동안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한 번도 들어 본적 없는 현대음악을 12살에 처음 대하게 된 것이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딛은 것처럼, 내 해석과 연주가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된다니 애착도 밀려 왔다. 내 고민이 깊으면 깊을수록, 연습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곡은 다시 태어날 운명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3주에 걸쳐 그 곡을 암기해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끝마쳤다. 프랑스 안시에 도착한 뒤 "악보를 보고 칠거지?"하고 묻는 마추예프에게 "아니오"라고 답했을 땐 살짝 쾌감이 들었다. 내가 악보를 보고 낑낑거리며 연주할 거란 상상을 했을 거란 생각에 '더 잘쳐야겠다' 다짐했다.

공연 하루 전 나는 안시 페스티벌 측의 배려로 그 곡을 쓴 작곡가를 만나 1시간 동안 레슨도 받았다. 처음 만나 나눈 인사 속에서 작곡가의 불안한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마추예프에게 준 곡을 고작 12살 꼬마가 초연한다고 하니 엄청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시간의 리허설이 끝나자 그의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내 입장에서도 걱정이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레슨을 다 마치고 작곡가는 그 곡의 악보에 '데니스 마추예프에게'라고 쓴 표현을 지우더니 '임주희에게'라고 고쳐 썼다.


피아니스트 임주희가 그린 카롤 베파.

피아니스트 임주희가 그린 카롤 베파.


그가 바로 피아니스트 출신 작곡가 카롤 베파다. 그날 공연에서 연주한 '피아노를 위한 토카타'의 악보에는 지금도 내 이름이 쓰여있다. 연주는 성공적이었다. 그날 무대 뒷켠에서 마추예프가 내 연주를 들으며 악보를 점검했다고 한다. 내가 만약 주변의 응원만 듣고 편안하게 준비했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연주 다음날 안시 페스티벌에서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 것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카롤 베파와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카롤 베파로부터 연락이 왔다. 12개의 에튀드를 작곡했는데 그 중 한곡의 제목이 '임주희'라고. 작곡가로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곡을 헌정받는다는 것은 연주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또 연주자에겐 훌륭한 연주로 그 곡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긴다.

2011년 마추예프를 위한 옷에 내 몸을 맞춰야 했다면, 이 곡은 나만을 위한 맞춤옷이다. 나는 이 옷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프랑스 안시 페스티벌에서 ‘피아노를 위한 토카타’를 열심히 치던 12살의 꼬마 임주희의 모습이 어려있는 에튀드, 그 ‘에튀드 임주희’를 듣는 관객들 머릿 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피아니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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