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54>사진치유자 임종진
사진 기자 그만두고 국가폭력 생존자들과 작업
“사진은 마음을 찍는 일, 그 과정이 곧 심리 치유”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잘 봐야 한다? 아니다. 잘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세상을 찍는 도구? 아니다. 나를 담는 창이다. 카메라는 눈으로 보고 찍는 것? 아니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임종진(52) ‘달팽이사진골방’ 대표는 사진, 그리고 사진 찍는 행위의 의미를 전복시켰다. 그는 사진은 곧 치유라고 말한다.
그에게 사진은 찰나의 예술이 아니다. 마음 속 곪아터진 상처를 대면하는 용기이며, 그런 과정을 거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치유의 미학이다. 그저 주장이 아니다. 수년간 임상 경험을 거쳐 내린 ‘정의’다. 5ㆍ18 민주화운동 피해자,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그 증인이다.
이를 테면,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전일빌딩에서 바깥의 동태를 살피러 나갔다가 계엄군에 붙잡혔던 시민군 출신 황의수(67)씨. 그는 5ㆍ18 이후 전일빌딩을 피해 살았다. 건물 앞 계단은 그가 계엄군의 총 개머리판과 군홧발에 몸이 짓이겨진 고통의 공간, 머리를 박고 ‘원산폭격’을 해야 했던 모멸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똑딱이 디카(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33년 만에 처음 찾아간 날, 그는 전일빌딩을 마주하지 못했다. 주위를 빙빙 돌다 옆에서 겨우 셔터를 눌러 단 한 장을 찍었다. 사진 속에서 계단은 상하로 누웠다. 왼편엔 건물 앞에 세워진 오토바이 바퀴마저 빼꼼 보였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수평조차 맞지 않는 그야말로 ‘꽝’인 사진. 그러나 그것이 그때 그의 마음이었다. 그런 힘겨운 대면을 몇 차례 한 뒤, 비로소 전일빌딩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계단과 건물 입구가 사진에 제대로 담겼다.
임 대표는 “상처의 실체를 대면하고, (구도를 잡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처에 맞서면서 그 공간을 전복했다는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진을 해석하는 데에 황금분할이니, 색감이니, 구도니 하는 말들은 의미가 없다.
그도 한때는 아스팔트를 누비며 분초를 다투는 사건 현장을 담는 일간지 사진기자였다. 피사체를 취재 대상이 아니라 찍는 이의 마음이 담긴 실체로 인식하게 된 건 폐암 말기였던 아버지의 마지막 두 달을 카메라에 담으면서였다.
과정의 사진, 시간의 사진, 치유의 사진을 전파하는 임 대표를 지난달 25일 서울 은평구 ‘달팽이사진골방’에서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공감사진 교육 과정을 운영한다. 2017년에 만든 사진 치유 전문 ㈜공감아이 대표도 맡고 있다.
◇오른쪽 시력 잃었지만 덕분에 사진을 업으로
-대학 전공도 시각디자인인데, 카메라를 들게 된 이유가 뭔가요?
“한국화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림을 하면 굶는다고 하던 시절이니 디자인을 전공으로 택한 거죠.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군에서 제대하고 우연히 사진학 강의를 들었는데 푹 빠졌죠. 이후에 (대전에서 활동하던) 조인상 사진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어요.”
-가수 고 김광석씨 공연 사진을 많이 찍은 걸로도 잘 알려졌잖아요.
“맞아요. 대학시절에 김광석씨를 아주 많이 좋아해서 공연 갈 때마다 무대 가까이서 찍기 시작했죠. 흑백 필름으로 찍어서 혼자 암실에서 인화할 때마다 형(김광석)의 미소 짓는 얼굴이 쓱 나타나는 게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사진은 결국 마음이고 사랑이라는 걸 처음 느낀 거였죠.”
그걸 계기로 김광석씨와 인연도 맺었다. 당시 사진들은 2008년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란 에세이집에 담아 출간했다.
-취미였던 사진을 업으로까지 생각한 계기가 있나요?
“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대학 때 사고로 한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됐어요. 체육대회 뒤풀이 중에 싸움 난 친구를 말리다 당한 사고였죠. 상대편이 유도선수였는데 나를 아스팔트로 메다꽂은 거예요. 오른쪽 눈가가 땅에 부딪혔고, 시신경이 끊어져서 시력을 잃었죠. 절망스런 마음으로 병원에 누워있는데 조인상 선생님이 문병을 와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이고, 너는 평생 사진할 놈이구나’라고요. 카메라는 (뷰파인더를) 보통 한쪽 눈으로 보고 찍으니까.”
-그 한마디가 인상적이었군요.
“내게 용기를 심어준 거죠. 내 가슴을 파고 들었어요.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계기였죠.”
대학 졸업 후 그는 대전의 지역언론사를 거쳐 진보 월간매체 ‘말’지(2009년 폐간)에 입사했다. 사진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시대의 창’이란 코너를 맡으며 업계에 이름도 알렸다. “주말에 쉰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어요.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독거 노인 같은 한국사회 소수계층의 삶을 이 코너에 담았죠.”
그러던 차 새로 부임한 편집국장과 갈등으로 결국 나오게 된다. 열정을 다 바쳤으나 허탈하게 퇴사를 하게 되면서 그는 사진을 그만둘 생각도 했다.
◇투병하던 아버지를 찍던 마음
-‘말’지를 나오고 나서는 어떻게 보냈나요.
“공교롭게도 당시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어요. 복잡한 감정이 들었죠.”
-왜인가요.
“아버지는 내게 아주 먼 사람이었어요. 밖에선 풍류를 즐기는 호인이었지만, 집안은 돌보지 않았죠. 나까지 형제가 다섯인데, 모두 어머니의 피땀어린 노동으로 자랐어요. 그런데다 아버지는 무척 권위적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나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늘 노력했어요. 아버지는 그걸 받아주지 않았죠. 한번은 1등을 해서 성적표를 들고 달려가 내밀었는데 아버지가 점수를 보더니 ‘91점이 뭐야’ 하면서 휙 던지시더라고요. 돌이켜보면, 내 안의 오랜 열등감과 모멸감의 근원이 아버지였고 그래서 서서히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닫게 된 거였어요.”
-아버지 상태는 많이 안 좋았나요.
“마침 회사도 그만뒀으니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대형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폐암 말기라더군요. 그때 (내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런데 아버지가 더 무너지셨어요. 병원에선 여섯 달 정도 사실 거라고 했는데 결국 두 달 만에 돌아가셨거든요. 포기를 하신 거였죠. 투병하시는 동안 주로 내가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있었는데, 아버지를 찍기 시작했어요.”
-병든 아버지를 카메라로 담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맞아요. 뭔가를 부여잡고 싶은 마음으로 한 컷, 두 컷 찍게 된 것 같아요.”
-그건 어떤 감정일까요.
“아버지를 보면서 흔들리는 내 감정을 카메라 프레임으로 보호받고 피하려 한 거죠.”
-카메라로 자신을 보호한다?
“네, 그때 그런 독특한 감정을 처음 느꼈어요. 또 찍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기도 했고요. 그렇게 찍은 필름이 5, 6롤쯤 되는데, 아직도 인화를 못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그 사진들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글로 써서 책으로 내고 싶은 마음이 있죠.”
-아버지와 함께 한 그 두 달이 어떤 의미였나요.
“사진을 계속 하도록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해요. 그 이전까지 내가 하는 사진의 방식은 취재 대상을 찍는 행위이자, 연민의 감정으로 그들에 관한 얘기를 세상에 하고자 하는 도구였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를 찍으면서 ‘사진한다’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됐어요.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버지가 당신 몸을 통해서 내게 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아닌가 싶어요.”
이후 2002년 그는 ‘한겨레’에 경력 사진기자로 입사한다.
-일간지 사진기자 생활은 어땠나요.
“늘 급박하게 하루를 보내야 했으니 힘들긴 했지만, 일해보고 싶었던 매체였기 때문에 열심히 했어요. 회사 안팎에서 좋은 평가도 받았죠. 하지만 서서히 버거워졌어요. 아버지와의 시간을 보낸 이후 사진을 하는 방식을 두고 내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어요. 사진으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내 사진엔 고통과 절망만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 현장을 찍으면 나도 그 안에서 부대끼며 열심히 찍긴 찍는데 사진 안엔 그들이 힘겨워하는 모습뿐이었던 거예요.”
2003년 이라크 전쟁 취재가 큰 전환점이 됐다. 당시 그는 반전ㆍ구호 활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들어갔고 한국 기자로는 최초로 현지 상황을 사진과 기사로 보도했다.
-바그다드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자발적인 결정이었나요.
“어느 날 야근을 하면서 뉴스를 보는데 ‘진짜로 전쟁이 터지면 민간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이라크의 민간인에 대한 기사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죠. 요르단 접경 지역 상황만 간간이 나올 뿐이었어요. 마침 한국에서 반전평화팀이 결성됐고 그 일원으로 참여한다면 바그다드까지 들어갈 수 있었어요. 회사에선 말렸죠. 편집국장을 설득했고 가게 됐어요. 국장도 진짜 바그다드에 갈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취재가 어떤 사안이나 상황, 사람을 취재 수단으로 바라보던 나를 반성하게 했죠.”
◇이라크 종군기자 경험으로 바뀐 시선
그는 바그다드에서 만난 카심 얘기를 했다. 현지에서 취재나 기사 송고를 도와주는 가이드였다.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2003년 3월 19일, 카심은 그에게 “내 부탁을 꼭 들어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곳을 떠나줘요. 그것이 친구인 나를 위하는 길이에요.” 카심은 그를 기자가 아닌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라크에서 돌아오고 난 뒤 서서히 그의 마음 속엔 ‘기자’라는 옷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리 잡아갔다. 우연한 계기로 수원정신보건센터에서 정신장애인들을 대상으로 6개월간 사진 치료 수업을 하면서 사진이 지닌 치유의 힘을 경험하게 됐다.
-어떤 치유의 힘인가요.
“후천적으로 정신장애가 온 사람들한테 일상 생활은 불가능해요. 그런데 사진은 대면하지 않고는 찍을 수 없잖아요. 그들에게 무언가에 다가설 수 있는 도구로 카메라를 쓸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6개월 정도 수업을 하면서 내게 마음을 여는 것을 느꼈어요. 나중에는 사진에 짤막한 글을 써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게 되는 걸 보면서 사진이 가진 치유의 힘을 알게 된 거죠.”
2004년 2주간 머물다 온 걸 계기로 매년 찾은 캄보디아에서 보낸 시간도 사진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게 했다. 그는 에이즈 환자, 장애인, 지뢰피해자, 난민, 소수민족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면서 대상을 오감으로 느끼고 듣고 관찰하면서 깊게, 느리게 찍는 사진의 묘미를 알게 된 거다. 그건 ‘사람이 우선인 사진’이었다. 그의 사진 철학이다. 2006년 퇴사하면서 그는 기자로서 찍는 사진에 정식으로 안녕을 고했다. 캄보디아로 다시 떠나 1년 반 동안 머물다 돌아온 뒤엔 본격적으로 사진 심리 치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진심리상담사 양성 과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자격증을 땄고 그것만으로는 아쉬워 상담심리 석사과정도 밟고 있다. 그의 사진 치유는 5ㆍ18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깊고 넓어졌다.
-5ㆍ18 피해자들의 심리 치유를 돕게 된 계기가 뭔가요.
“2012년 가을에 광주 트라우마 센터에서 사진 치료 강의를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무조건 하겠다고 했죠.”
-사진 치료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요. 첫째는 상처와의 대면, 둘째는 원존재와의 대면이죠. 예를 들면, 자신이 체포됐거나 폭행, 고문을 당한 장소는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공간이에요. 원존재와의 대면은 원래의 나를 만난다는 의미이죠. 즐거운 기억이 있거나 자신에게 소중한 곳, 혹은 그런 존재와의 대면이에요.”
-그렇게 구성한 까닭은요.
“피해자 선생님들은 누구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생긴 요인이나 공간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살아오셨어요. 당시 옳은 일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죠. 떠올리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그 곪아터진 감정을 덜어내고 풀어낼 기회를 드리는 거죠.”
◇카메라를 들고 몸이 짓밟힌 공간에 가는 일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는 어렵겠네요.
“맞아요. 일단 사진 치료 프로그램에 재미를 느끼게 하려고 초반에는 산과 들을 찾아 다녔어요. 휴식을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사진 찍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드리는 거죠. 자연스럽게 개별 상담을 하면서 5ㆍ18 당시의 기억도 정리해보고요. 그랬더니 (피해자) 선생님들마다 1980년 이후 가보지 못한 공간이 있더라고요. 서서히 그 곳에 가볼 수 있도록 도와드렸죠.”
-그렇다면 같은 장소를 여러 번 가는 건가요.
“그렇죠. 지속적으로 가야 해요. 한번에 그치면, 공포에서 끝나고 말아요. 처음엔 전부 엄청 힘들어 하시죠. 분노와 두려움, 이 두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표출되는 거예요. 두세 번 가면 감정도 달라지죠.”
-사진에서 감정 변화가 드러나나요.
“그럼요. 예를 들어, (시민군이었던) 황의수 선생님은 33년간 전일빌딩 앞을 가지 못했어요. 새벽에 동태를 살피러 빌딩 아래로 내려왔다가 계엄군이 ‘손 들어’ 한 거죠. 그 순간 몸을 피할까 말까 고민을 하셨대요. 그런데 조준하고 있으니 피할 수는 없었고 그대로 잡히고 만 거예요. 계엄군이 달려들어서 군홧발에 몸이 짓이겨지고 계단을 구르고 그때 허리를 다쳐서 나중에 수술까지 받으셨어요. ‘대가리 박으라’는 말에 이른바 원산폭격도 해야 했던 장소였고요. 그러니 자존감을 상실하고 모멸감을 느낀 공간인 거죠. 금남로나 전남도청 앞에서 하는 5ㆍ18 행사는 다 가면서도 전일빌딩 앞만은 그동안 가지 못하신 이유예요. 이 분이 처음 그 곳에 사진 찍으러 가셨을 때는 얼굴이 벌개지고 계속 입술에 침만 바르셨죠. 맨눈으로는 차마 보지 못하는 곳을 그나마 렌즈를 통해 보신 거예요. 그것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옆에서요. 처음에 딱 한 장 찍으셨는데 그게 이 사진이에요.”
그가 보여주는 사진에서 계단은 사선으로 누워있었다.
-그나마 카메라를 들었으니 렌즈를 통해 볼 수 있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카메라라는 막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감정이 드는 거예요.”
그건 권위의 상징이었던 아버지, 맨눈으로 보기 두려웠던 아버지의 마지막 두 달을 겨우 카메라를 통해 마주할 수 있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옆에서 간신히 찍었던 사진이 바로 서기까지
-여러 번 가면서 사진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긴장이나 두려움이 덜해지면서 사진에도 그 변화가 나타나죠. 이게 황 선생님이 나중에 찍으신 사진이에요.”
전일빌딩 계단을 정면으로 응시한 사진이었다.
-이 사진의 의미는 뭔가요.
“당시의 감정이 본인 마음 속에서 어떻게 재기억 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황 선생님은 비로소 아픈 기억을 마주해서 끄집어내놓고 다시 뒤집어서 앉힐 수 있게 된 거예요. 트라우마가 사라질 수는 없어요. 하지만 맞설 수 있게 되면서 이 공간을 전복했다는 감정이 생기는 거죠. 나중에는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임 선생, 내가 이번에는 계엄군이 나를 (총으로) 겨눴던 데에 서서 찍었어’라고. 그 마음이 사진에 드러나는 거예요.”
그의 설명을 들으니, 평범하디 평범한 건물 사진이 다르게 보였다.
-원존재와의 대면이란 어떤 건가요.
“자신이 세상과 연결돼있다는 유기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소중한 존재, 예를 들면 손주들 모습을 찍어오시면 ‘선생님이 살아계시니 이렇게 손주들 재롱도 보실 수 있는 거죠’ 이런 말씀을 해드려요. 피해자 선생님 중에는 정신과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는 분이 적지 않아요.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는 분들도 많죠. 가족과의 관계는 뒤틀리기 십상이고요. 자존감을 억제해오며 살아온 이 분들이 맘껏 즐거워하고 행복해해도 된다고 느끼도록 도와요.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도록 장치를 깔아드리는 거예요.”
-그런 전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시나요?
“저는 상담자일 뿐이죠. 또 함께 가드리고 지켜보죠. 이렇게 하시라, 저렇게 하시라 하지 않아요. 그리고 찍어오신 사진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드리죠.”
-그럼 사진을 찍는 기술은요?
“이 과정에서 그건 중요치 않아요. 초점이 흔들리면 흔들린 대로, 구도가 틀어졌으면 틀어진 대로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카메라를 쥐어드리고 온ㆍ오프 버튼을 알려드릴 뿐이에요.”
기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찍어야 하기에 그럴 것이다.
-최근까지도 5ㆍ18 피해자 선생님들을 만나고 있죠.
“광주 트라우마 센터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2016년에 끝났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선생님들을 만나는 일을 그만둘 순 없었어요. 이후엔 제가 자발적으로, 자비를 들여서 광주를 오가고 있죠.”
-그만큼 이 프로그램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럴 텐데요.
“우리 국민 중에 5ㆍ18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예술ㆍ문학 작품도 많아요. 해마다 5월이 되면 기사도 많이 나고 진실 규명 작업도 진행되고 있어요. 하지만 피해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런 항쟁의 집단성에 묻혀서 정작 당사자 개인들은 잊힌 거예요. 피해자 선생님들의 치유 과정에서 중요한 건 일단 개인의 존재성이 인정되고 주목 받도록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찍은 사진들을 모아 전시를 하는 것도 치유의 한 과정이다. 전시 사진집에 작가인 피해자들의 얼굴 사진과 이름, 소개글을 일일이 넣는 것도 그래서다.
◇간첩으로 몰려 징역까지 산 이들의 사진
그는 2014년부터는 인권단체 ‘지금여기에’의 의뢰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도 돕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 영문도 모른 채 간첩으로 몰려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고통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다. 고문을 받은 걸로도 모자라 억울하게 수년에서 수십 년 옥살이까지 했다. 뒤늦게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더라도 감옥에서 보낸 세월,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피붙이, 극심한 고문으로 짓이겨진 영혼은 돌아올 수도 완전히 회복될 수도 없다. 이들의 트라우마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임 대표는 사진으로 이들의 치유를 도왔고 지난해 10월 서울 남영동 옛 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나는 간첩이 아니다’란 사진전을 열었다. 생존자들이 과거 국가폭력을 당한 장소와 대면하면서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은 전시였다. 그는 “과거 ‘고통의 상징’이 ‘치유의 공간’으로 바뀐 시간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고문도 고문이지만 억울하게 징역까지 살아야 했으니 그런 한 맺힌 과거와 대면하기까지 굉장히 어려울 것 같아요.
“맞아요. 대부분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농사 짓다가, 장사하다가 잡혀가서 고문 당하고 징역형까지 선고 받은 분들이에요.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요. 그러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죠.”
-이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했나요.
“훨씬 속도를 천천히 했어요. 옛날 남산 중정(중앙정보부) 별관 건물들, 서대문 형무소 같은 수감 장소, 고문을 받았던 각 지역의 옛 보안대 건물들에 가죠. 이건 고 김태룡(삼척 일가족 고정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ㆍ2년 전 사고로 작고) 선생님이 여러 번 간 끝에야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을 찍은 사진이에요.”
그가 보여주는 사진은 사형장과 사형장 지하의 모습이었다.
-사형장을 왜요?
“여쭤보니 ‘아이고, 내가 꼭 들어가봐야겠더라’면서 이유를 말씀하시더라고요. 당신의 부친이 사형을 당한 곳이었던 거예요. 자식 된 도리로 부친의 숨이 마지막으로 붙어있던 곳을 가보고 싶었다는 거죠. 그야 말로 샅샅이 찍으셨더라고요. 그런 사진들을 보면 정말 기가 막혀요.”
그의 말을 듣고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사진에서 피눈물이 비쳤다.
◇사비까지 들여 사진 치유 매달리는 이유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닌데 왜 사진 치유에 매달리나요.
“선생님들이 나와 보내는 시간을 기대하고 기다려주시거든요. 나 스스로 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산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피해자) 선생님들과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나를 엄청나게 단련시켰고 행복도 느껴요. 오감을 열어서 사람이든, 공간이든, 현상이든 충분히 깊게 들으며 찍는 사진을 하는 이유죠.”
-그래도 가족이 있으니 경제적인 걸 무시할 수 없을 텐데요.
“그게 딜레마예요. 그래서 사진 치유 프로그램을 하려고 강연도 다니고 다른 작업도 하죠.”
-이런 프로그램이나 전시는 공익성이 강하니 정부나 지자체에서 지원할 법도 한데요.
“작년에 남영동 옛 대공분실에서 한 전시도 실비 중 3분의 2는 사비로 해결한 걸요. 여기저기 다니며 후원을 받으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는데 나중엔 관뒀어요. 화가 나더라고요. 이런 얘기를 하면 속상한데… 수모를 너무 많이 당했거든요.”
아마도 피해자니, 간첩이니, 국가폭력이니 하는 단어들에 근거 없는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됐다. “사진 치료요? 사진으로 어떻게 치료를 해요?”라며 사기꾼 취급을 당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 일들을 털어놓으며 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은 우리인데. 국가가, 사회가 해야 할 치유를 그가 대신했는데 말이다. 돕는 사람을 돕는 일이라도 공동체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진으로 상업적 일들을 하며 편히 살 수도 있었는데 이런 길을 택한 이유가 뭔가요.
“그 분들이 좀더 나은 모습으로 웃는 걸 볼 때 느끼는 충만함이 있어요.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되는 즐거움이죠. 저는 그저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할 뿐 선생님들이 주인공이거든요. 이게 저한테 맞는 옷이에요. 지금은 보편적 의미의 사진작가로 인정 받는 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나 스스로를 사진치유자라고 하는 거죠. 하지만 생계도 유지해야 하는 게 현실이에요. 그래서 내년쯤 ‘마음을 찍어주는 사진관’을 만들어보려고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어요.”
그건 그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찾은 타협점일 터였다.
-카메라로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에 담긴 의미를 뭐라고 생각하나요.
“흔히 나의 바깥 세상을 찍는 거라고 여기기 쉬운데, 실은 내면을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카메라는 나를 보는 창이죠. 그간 나 역시 나에게 맞는 창을 찾아왔고 그게 사진 치유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한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내 안에서 나오는 신호에 화답하며 살자는 거예요. 나이 마흔에 기자를 그만뒀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인 결과였죠. 마음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4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는 마치 시냇물 같았다. 소박하나 맑은 물이 내내 졸졸졸 흘렀다. 그가 만든 치유의 물줄기가 고갈되지 않고 순환하기를, 나도 모르게 바랐다. 그건 홀로 흘러서는 될 수 없는 일일 거다. 다른 수많은 물줄기들을 만나야 강물이 될 테니. 그리하여 끝내 치유의 바다를 이루는 일, 상상만으로도 힐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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