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은퇴 후 ‘의학 속 문학’ 연구하는 유형준씨
편집자주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 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지난 5월 막을 내린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케이블 TV채널 드라마로는 꽤나 높은 16.3%(닐슨코리아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상반기 최고 히트작으로 꼽혔다. 의사들은 대체로 차갑고, 딱딱하고, 환자를 돈벌이로나 보는 대상으로 여겨져 왔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에선 달랐다. 20년지기 다섯 의사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밴드를 결성해 노래하고, 때론 어려운 이들에 대가 없이 치료비를 지원하는 ‘키다리 아저씨’로 살아가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시간이 갈수록 값비싼 첨단 의료기기들이 환자의 진단 기능을 대체하고 있음에도, 사람(환자) 치유하는 건 결국 사람(의사)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한 드라마다.
그럼에도 능력 있고 친절하며 환자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굿 닥터’를 만나기 어려운 게 현실이란 시선이 많지만, 재작년 대학병원 은퇴 후 ‘의학 속 문학’을 연구하며 사는 유형준(67)씨는 “굿 닥터가 늘어날 길은 글과 책 속에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서울대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77년 의사 면허를 취득한 뒤 국립중앙의료원, 한림대병원 등에서 줄곧 의사로 살아온 그는 의사생활을 하며 시인, 수필가로도 활동한 특이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92년 월간 문예지 ‘문학예술’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한 그는 1996년 같은 문예지에 시인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2013년엔 ‘문학청춘’에 시인으로 등단해 이제껏 ‘의사 겸 문학인’으로 살아왔다. 재작년까지 ‘문학 하는 의사’로 살았다면, 대학병원 은퇴 후 일주일에 세 번 사설 병원으로 출근하는 지금은 ‘의료 하는 문학인’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의사로 살아가는 것만 해도 바쁘고 피곤할 텐데, 그는 왜 문학을 놓지 못했을까. 유씨는 청송교도소(현 경북북부교도소)의 사형수와 편지를 주고 받은 1990년대 후반 얘기를 꺼내며 “글을 통해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40대 청년 시절, 내가 일하는 병원으로 도착한 사형수의 편지는 그의 인생뿐 아니라 내 인생에서도 큰 힘이 됐다”며 글을 통한 ‘공감의 힘’을 전했다. 유씨는 “사형수는 내가 쓴 ‘옥중서신’이란 의학 관련 글을 보고 내게 편지를 썼고, 자신이 앓고 있던 당뇨 합병증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다”며 “이후 4년 이상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의 건강상태와 심리상태가 점차 나아지는 걸 느꼈고, 그 기간 동안 모범적인 수감생활로 감형을 받았다고 해 보람이 컸다”고 말했다.
이 같은 계기로 대학병원 은퇴 무렵부터 본격적인 ‘의학 속 문학’을 연구하면서, 재작년과 지난해까지 한국문예창작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승하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등과 ‘의학과 문학의 접경 연구 세미나’를 열었다. 여기에선 ‘문학사적 의의를 남긴 해외 의사 문인’, ‘의사가 그린 의사, 그 빛과 그림자’ 등 다양한 주제로 의학과 문학의 흥미로운 교집합 사례들을 논했다. 지난해엔 '굿 시니어'가 되고픈 이들을 위한 저서 '늙음 오디세이아'를 출간하기도 했다. 때론 노년의 의사들이 모인 ‘의사시니어클럽’ 회원들과 문화활동을 함께하거나 의료인력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 자리에선 병원에서 한 발 물러서니 들리는 의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는 “(노년 의사들도)요즘 의료계가 갈수록 차갑고 돈만 아는 집단으로 여겨지는 데 대한 공감을 많이 한다”고 짚었다.
유씨는 특히 학창시절부터 더욱 더 치열한 경쟁을 해 온 젊은 의사들에게 문학의 힘이 더 필요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는 “예를 들면 흙 같은걸 주워먹거나, 머리털을 주워 먹어 장이 막히는 증상이 동화 ‘라푼젤’에서 유래한 ‘라푼젤 증후군’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한다면 환자와 친밀도를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이상후두돌출을 칭하는 ‘아담의 사과’, 간경병 복벽 정맥을 이르는 ‘메두사의 머리’ 같은 이름이 붙은 것처럼 문학이 의학 속에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를 차츰 터득한다면 환자와의 정서교류 역시 수월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우리는 의학을 하지만 문학이 지닌 감성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는 셈”이라며 “이는 예전엔 찾아보기 힘들었던 의료인문학 강의가 이제 거의 모든 의대에 개설된 이유이기도 하다”고 했다.
환자 몸을 잘 고치는 의사가 단연 으뜸으로 꼽히지만, 여기에 환자와 공감지수를 높인다면 진정한 굿 닥터라는 게 그의 지론. 그가 말하는 굿 닥터가 되는 길은 특별하진 않다. 환자에게 증상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하고, 아픔을 공감해 주는 의사가 늘어날수록 의사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거란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환자와 의사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청진기의 발명 때문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얘기처럼, 지금은 환자는 자기공명영상법(MRI) 촬영을 하고 있고 의사는 다른 방에서 결과를 먼저 보지 않느냐”고 짚으면서 “의사와 환자의 거리가 갈수록 멀어지지만, 기계가 해줄 수 없는 것(공감 등)을 채워 줄 수 있는 건 결국 의사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의사들이 젊을 때 가장 경계할 것은 일만 하는 것”이라며 “후배들에겐 꼭 문학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비용을 들여 음악이나 영화, 스포츠 등 병원 밖 세상을 접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길 권한다”고 했다. 유씨는 “의사 자격증 따는 건 의대 나온 이들에겐 평균 수준의 성과”라며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를 충분히 고민한다면, 자신이 바라던 의사의 모습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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