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이념을 초월해 같은 겨레임을 자각해야 화합의 길이 열린다. ‘문화의 힘’이 남과 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라는 김구 선생의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 서거 71주기인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만난 정양모(86)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에게 한국전쟁은 평생의 한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의 막내아들인 정 회장은 16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납북을 겪었다. 정 회장은 “죽으면 잊기라도 하지만 생이별은 결코 잊혀지지가 않는다”면서 “6ㆍ25 전쟁 발발 70년이 지났지만 남북 관계가 늘 암담한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 모두가 한 민족이었다는 겨레의식이 과거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면서 “김구 선생이 늘 그러셨듯, 남북의 문화적 연대가 그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회장과 김구 선생의 연은 부친을 통해 맺어졌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정인보 선생이 1945년 해방을 맞아 2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을 환대하러 나간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가 됐다. 정 회장은 “1945년 서울 흑석동에 살았을 때 김구 선생이 두 번이나 집에 찾아오셨다”면서 “김구 선생에게 절을 올리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2층에 올라간 순간 온 집이 김구 선생으로 꽉 찼고 큰 산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구 선생과 정인보 선생은 17년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존중하며 소통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8월 17일 조선후기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 선생 묘전에서 김구 선생이 제문을 읽을 때 직접 글을 짓고 쓴 사람이 정인보 선생이었다. 정 회장은 “한학자인 아버지가 남의 제문을 쓰는 일은 없는데도 직접 나섰다는 건 김구 선생과의 친분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김구 선생 서거 당일 정인보 선생이 만시(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를 지어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정 회장이 2014년 백범김구선생기념관 관장을 맡은 배경에도 세대 간의 연이 있다.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ㆍ국립경주박물관장 등을 역임한 정 회장에게 관장직을 제안한 사람이 김구 선생의 차남인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이었다. 정 회장은 “김신 당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이 백범 좌상제작 및 박물관, 미술관 자문을 부탁했다”면서 “선친들의 인연을 계기로 가까워지면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의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내 철학이 백범 김구 선생이 주창한 문화강국과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그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전시를 하고 싶다”면서 “특히 한국문화 심포지엄과 학술회의 등 문화적 접근을 통해 겨레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야말로 김구 선생이 말한 문화강국을 이루고 남북화합을 모색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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