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김구기념사업회장 “문화로 남북화합 모색하는 것이 백범의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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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모 김구기념사업회장 “문화로 남북화합 모색하는 것이 백범의 유지”

입력
2020.06.26 18:21
수정
2020.06.2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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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백범김구기념관 앞에서 정양모 백범기념관사업협회 회장이 문화의 힘으로 겨레의 화합을 강조한 김구 선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남북이 이념을 초월해 같은 겨레임을 자각해야 화합의 길이 열린다. ‘문화의 힘’이 남과 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라는 김구 선생의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 서거 71주기인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만난 정양모(86)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에게 한국전쟁은 평생의 한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의 막내아들인 정 회장은 16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납북을 겪었다. 정 회장은 “죽으면 잊기라도 하지만 생이별은 결코 잊혀지지가 않는다”면서 “6ㆍ25 전쟁 발발 70년이 지났지만 남북 관계가 늘 암담한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 모두가 한 민족이었다는 겨레의식이 과거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면서 “김구 선생이 늘 그러셨듯, 남북의 문화적 연대가 그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회장과 김구 선생의 연은 부친을 통해 맺어졌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정인보 선생이 1945년 해방을 맞아 2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을 환대하러 나간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가 됐다. 정 회장은 “1945년 서울 흑석동에 살았을 때 김구 선생이 두 번이나 집에 찾아오셨다”면서 “김구 선생에게 절을 올리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2층에 올라간 순간 온 집이 김구 선생으로 꽉 찼고 큰 산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구 선생과 정인보 선생은 17년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존중하며 소통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8월 17일 조선후기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 선생 묘전에서 김구 선생이 제문을 읽을 때 직접 글을 짓고 쓴 사람이 정인보 선생이었다. 정 회장은 “한학자인 아버지가 남의 제문을 쓰는 일은 없는데도 직접 나섰다는 건  김구 선생과의 친분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김구 선생 서거 당일 정인보 선생이 만시(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를 지어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1949년 5월 29일 백범 김구(오른쪽) 선생과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함께  서 있는 모습. 김구 선생이 서거하기 전 마지막으로 두 명이 함께 한 날이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정 회장이 2014년 백범김구선생기념관 관장을 맡은 배경에도 세대 간의 연이 있다.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ㆍ국립경주박물관장 등을 역임한 정 회장에게 관장직을 제안한 사람이 김구 선생의 차남인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이었다. 정 회장은 “김신 당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이 백범 좌상제작 및 박물관, 미술관 자문을 부탁했다”면서 “선친들의 인연을 계기로 가까워지면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의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내 철학이  백범 김구 선생이 주창한 문화강국과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그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전시를 하고 싶다”면서 “특히 한국문화 심포지엄과 학술회의 등 문화적 접근을 통해 겨레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야말로 김구 선생이 말한 문화강국을 이루고 남북화합을 모색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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