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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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전공 필수과목을 들을 때였다. 담당교수는 앞서 20여년 동안 이 과목을 강의했던 A교수. 똑 같은 책과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을 수십년간 반복적으로 가르친 때문인지, 강의에선 의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강의노트는 빛이 바래 누랬고, 페이지를 넘길 땐 찢어질까 엄지와 검지로 살짝 집어 조심스럽게 만질 정도였다. 강의도 앉아서 그 노트를 마냥 읽는 식이었다. 중간ㆍ기말고사는 모두 ‘족보’라고 불리던 기출문제와 순서만 다를 뿐 똑같았다. 줄줄 외어 시험을 봤으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고학번들에게 성적을 몰아준다는 소문을 절감했다. 고향에서 올려 보내주신 등록금이 그렇게 아까울 수 없었다.
나의 옛 경험과 등치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번 학기를 보낸 대학생들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고, 대학 역시 파장을 피할 순 없었다. 그 중 학생들의 수업권이 극도로 제한된 점은 가장 큰 피해로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코로나19 때문이라지만 한 학기 내내 이어온 온라인 비대면 수업을 정상적인 대학 강의로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온라인 강의는 수업의 질을 담보하지 못했다. 동영상 강의 한번 올리지 않고 모두 과제물로 대체한 강의도 적잖다. 한 학기 평균 400만원 안팎의 등록금을 내고 듣기엔 수준 이하의 강의가 태반이었다. 수업권을 막대하게 침해받은 대학생들이 혈서까지 써가면서 등록금 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여야 공히 등록금 반환이 필요하다는 데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상식적이다.
문제는 반환 방식이다. 애초 교육당국은 3차 추가경정예산에 1,900억원 가량을 편성해 반환을 지원하려 했다. 이에 예산당국이 제동을 걸었고, 다시 집권 여당이 반환 방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핵심은 “대학생들에게 등록금 문제는 하나의 재난이고 이를 정부가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선 순위가 바뀌었다. 등록금을 받은 대학에 먼저 요구했어야 한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양질의 수업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대학들은 그 의무를 방기했다. 그러면서 등록금 반환 문제엔 정부 뒤로 숨기 바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정부가 나설 것이라는 생각인 듯 하다. 책임을 져야 하는데, 되레 지원을 받게 되는 역설적 상황이다.
등록금이 10년째 동결이라 재정이 취약하다는 대학의 볼멘소리는 핑계다. 정부는 매년 국가장학금으로 4조원에 달하는 재정을 대학들에 지원하고 있다. 대학에는 등록금 수입이다. 대학혁신지원, 산학연협력고도화지원, BK21플러스 등 다른 재정 지원도 많다. 사립대 강사 처우개선, 시설ㆍ기숙사용자 지원 기금 등도 세금으로 뒷받침해준다. 등록금 인상을 하지 말라며 대신 각종 수익 사업도 허용해줬다. 세계화와 전문성 강화 명목이지만 실상은 돈벌이다. 상아탑이라기보다 기업에 가까워진 지 오래다. 이렇게 해서 쌓아 둔 적립금도 학령인구 감소로 줄었다지만 7조원이 넘는다. 등록금이 적다면서도 사용 내역을 밝힌 대학은 없다. 이럼에도 등록금 일부를 학생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나선 대학이 현재 건국대와 한성대밖에 없다는 것은 무책임하다.
대졸 중심의 사회에서 대학은 언제나 학생들에게 갑이었다. 학생들은 시키는 대로 강의를 듣고, 주는 성적을 받고, 등록금을 내야 했다. 그나마 기대할 것이라고는 학문ㆍ지성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유투브 강의보다 못한 갑의 민낯만 더 드러났다. 이런데도 등록금 반환 문제엔 ‘나도 피해자’라며 ‘을’을 자처하는 대학의 모습은 아연하기까지 하다. “반환 문제는 등록금을 받은 대학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 쪽이 책임을 지는 것이 국민들이 가진 상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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