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은 남이 아닌, 나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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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은 남이 아닌, 나의 몫

입력
2020.06.24 16:00
수정
2020.06.2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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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차현진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위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은 언제나 극적이다. 우연과 필연이 씨줄과 날줄처럼 잘 얽혀 있어 그 말을 듣다보면, “그 일은 결국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이를 핍진성(verisimilitude)이라고 한다. ‘그럴듯함’이다.

1950년 6월 24일의 증언도 핍진성이 넘친다. 오전 10시 육군본부 상황실에서는 장도영 정보국장(훗날 국방장관)의 주재로 국장급 회의가 소집되었고, 그 자리에서 북한반장 김종필 중위가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보고했다. 동료 박정희와 작성한 정세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에 있을 ‘장교구락부 준공기념 파티’ 준비를 위해 흩어졌다.

혼자 남은 김종필 중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창밖의 세찬 빗소리를 들으며 당직을 서다가 새벽 4시 의정부 제7사단 정보장교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38선 지역 11개 지점에서 4만~5만명의 북한군이 탱크와 함께 일제히 남하한다는 보고였다.

70년 전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밤새 내린 비로 서울의 하늘은 아주 청명했다. 그날 오전 중앙청에서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으나 흐지부지 끝났다. 경제부처 장관들이 외국 사절들과 함께 남해안 일대를 산업 시찰 중이라서 대거 불참했고, 국방부의 보고도 건성이었다. 38선에서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곧 수습될 것이라고 얼버무렸다.

월요일이 되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당시 유일하게 외국환을 취급했던 한국은행 창구에는 아침부터 주한 외교사절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65만달러를 인출했다. 점심때가 되자 의정부에서 피란민들이 내려오고, 여의도(당시 경기도 지역) 상공에서는 소련 야크기와 미군 무스탕기가 공중전을 벌였다. 김포에서는 북한 전투기가 공항을 폭격했다.

오후 6시 경제부처 장관들이 지방에서 열차로 올라오자 8시부터 국무회의가 열렸다. 새벽까지 계속된 그 회의에서 수도를 대전으로 옮기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한국은행은 아무것도 몰랐다. 27일 새벽 라디오에서 수도를 옮긴다는 뉴스가 나오자 비로소 피란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한국은행에는 운송수단이 없었다. 아침부터 여기저기 수소문하다가 점심때가 돼서야 겨우 국방부에서 트럭 1대를 수배할 수 있었다. 거기에 금 1.1톤과 은 2.5톤만 싣고 오후 2시 남하를 시작했다. 

금괴는 시흥, 수원, 대전을 거쳐 29일 새벽 4시 진해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미 해군함에 실려 샌프란시스코로 보내졌다가 다시 뉴욕 연준의 지하 금고로 옮겨졌다. 그리고 1955년 국제통화기금(IMF)에 출자금으로 납입되면서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28일 한국은행 본점을 접수한 북한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하 금고에 금괴 260㎏과 은괴 16톤, 그리고 1억장의 미발행 화폐가 고스란히 있는 것 아닌가! 지폐를 찍는 인쇄기와 인쇄원판도 버려져 있었다. 북한군 병사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반대로 우리 정부는 울음보가 터졌다. 대전에 도착한 한국은행의 수중에는 기껏해야 40억원밖에 없었다. 피란민들의 예금인출 요구에 응할 수 없어서 시중은행한테 수표 용지를 거둔 뒤 거기에 한국은행 도장을 찍어 임시 화폐로 썼다. 현찰, 인쇄기, 인쇄원판을 몽땅 북한군에게 빼앗겼으므로 화폐 대란과 인플레이션에는 완전 무방비였다. 10대 학도병들까지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되던 최악의 상황에서 부랴부랴 화폐 개혁까지 해야 했다(화폐 개혁을 국가적 위기나 혼란으로 보는 습관이 이때 생겼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겪은 많은 고난은, 첫 72시간 동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던 데서 비롯된다. 핍진성이 넘치는 그 무수한 경험담과 회고담의 한결같은 교훈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유비무환도 충분치 않다. 춘추시대 진(晉)나라는 주변국들과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외교 분쟁을 잘 중재했다. 그 중재 덕분에 전쟁을 피한 이웃나라가 값진 보물을 보내왔다. 선물을 받은 왕이 신이 나서 이를 부하들과 나누려고 하자 참모(司馬魏絳)가 나섰다. “편안할 때에 위기를 대비해야 근심이 사라집니다(有備則無患).” 그리고 선물을 돌려보내라고 충고했다.

진정한 유비무환은, 아랫사람의 충고를 듣고 뒤늦게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선물을 사양하는 겸손이 아니다. 목숨을 걸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경계하는 태도가 진짜 유비무환이다. 그런 점에서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cles)이라는 서양 격언이 더 적절하다. 가느다란 실 끝에 매달린 육중한 칼이 언제 내 정수리로 내리꽂힐지 모른다는, 생활 속의 위기감이다.

우리는 한국전쟁 초기의 실수들을 들으며 웃는다. 그런데 웃을 일만은 아니다. 바이러스와 또 다른 전쟁을 치르는 우리가 골든아워를 그냥 흘려보낸다면, 이 시대의 실수담은 다음 세대에 핍진성 넘치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다모클레스의 칼을 염두에 두고 거리두기를 잘 실천하는 것이, 이 전쟁을 치르는 바른 자세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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