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여군] 나라 위해 목숨 걸었지만 참전 사실 쉬쉬... 참전 여군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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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여군] 나라 위해 목숨 걸었지만 참전 사실 쉬쉬... 참전 여군의 비애

입력
2020.06.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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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70년, 여군이 있었다>③
6·25 참전 여군은 왜 잊혀졌나

대구 소재 기상전대 제151대대에서 여군 3명이 외국에서 전송된 기상예보 모스부호를 무선통신기로 수신하고 있는 모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6ㆍ25 전쟁 참전 여군 얘기를 들어서 뭐 하게. 우리는 장군도 아니고, 별로 자랑스러운 일도 안 했어."  

 여군의 뿌리를 찾기 위해 10여명의 6ㆍ25 참전 여군을 수소문해 만남을 요청했으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손사래부터 쳤다. 지난 70년간 국가와 사회가 관심을 두지 않던 얘기를 이제 와 꺼내는 게 새삼스러울 뿐더러 그 동안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이유에서다. 참전 여군들의 마음엔 왜 깊은 응어리가 남았을까.   


엘리트 여성 모았으나 전쟁 끝나자 구조조정

 여군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두 달여 만인  9월 1일 '육군 여자의용군'으로 처음 배출됐다. 군 당국이 전쟁 승리를 위해 '의식 있는 여성들의 사회적 동참'을 호소했고 엘리트 여성들이 이에 화답한 형식이었다. 여자의용군(이하 여군) 2기 이복순(87)씨는 "나는 글을 잘 쓰는 재주가 있었는데 군에서 논문 시험을 치르길래 자신이 있었지"라며 "군에 가면 여자라도 공부는 계속할 수 있을 줄 알았어"라고 지원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초기 여군에게 주어진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정훈대대, 예술대, 후방 행정요원으로 활동했다. 일부는 전투부대에 배치됐으나 실제 전투 참여보다 문서 작성, 연락 등의 단순 행정 업무나 포로가 된 북한군이나 중공군 여성 병사의 심문에 입회하는 일을 맡았다. 여성의 역할을 틀에 가뒀던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였다.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거나 끝날 무렵엔 직ㆍ간접적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여군 1기인 김순영(가명)씨는 "전쟁이 끝나고 대규모 감원이 이뤄지면서 여군 중 상당수가 군을 떠났다"며 "결혼을 이유로 자진해서 나온 사람도 있고, 나와야 하는 분위기여서 나온 사람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육군군사연구소가 2010년 펴낸 '국방여군 60년사'도 "전쟁이 소강상태에 놓이자 여군의 일부를 제외하고 마땅한 임무를 찾기 어려웠던 면이 있다"고 당시의 한계를 기술하고 있다. 


나라 위해 목숨 걸었지만 참전 사실 쉬쉬

 6ㆍ25 이후 참전 사실을 일부러 숨겼던 여군도 많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 '군인 출신 억센 여자'로 낙인 찍히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여군 2기인 박순덕(가명)씨는 "여자 나이 스무 살이 넘으면 결혼이 필수였던 시대인데 여군은 남자들과 함께 생활해 억센 이미지가 강해 꺼리는 분위기였다"며 "남편도 나와 결혼하기 전 군대에서 험한 일은 없었을지 일일이 뒷조사를 했을 정도"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능력을 펼치려 군에 남은 여군들은 결혼과 임신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을 강요 받았다. 1988년 이전까지 간호병과를 제외한  여군의 임신은 허용되지 않았다. 결혼도 여군 장교만 허용됐고, 부사관은 불가능했다. 

 1950년 여군 1기로 입대해 1965년 6월 중령으로 제대하기까지 16년간 복무한 이점례(88)씨도 결혼을 하려 제대를 택한 경우다. 이씨는 "군에 남아 외교관이 되고 싶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결국 제대했다"며 "부모님 권유에 결혼을 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군들은 참전 후 생활고에 시달린 동료들이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남군에 비해 복무 기간이 짧아 군인연금 수령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거나, 군에 남는 대신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 제대 후 자녀의 돌봄에 기댈 수 없는 형편인 사례가 많아서다. 김씨는 "퇴역 여군은 시대를 앞서나간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강해  어렵게 살아도 잘 하소연하지 않는다"며 "전쟁에선 나라를 위한다며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지만 개인의 삶만 놓고 보면 패배감이 들 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10일 서울 영등포구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6·25 전쟁 당시 참전 여군의 옷에  호국영웅기장이 달려있다. 이한호 기자



'여군의 뿌리' 참전여군 재조명돼야  

 1기 여군들이 군대 내 여성의 길을 개척했지만 군대 내 남녀차별 문화는 뿌리 깊었다.   '철옹성' 같았던 군대 내 유리천장은 2000년대 들어서야 서서히 깨지는 중이다.

 여군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여군의 뿌리'인 6ㆍ25 참전 여군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참전 여군들은 주요 전투에서 활약이 적었다는 이유로 6ㆍ25 기록 발굴 과정에서 소외돼 남군에 비해 기록물이 현저히 적은  상황이다. 김화숙 서울시의원(예비역 대령)은 "참전 여군들은 당시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사회적 틀을 탈피하고 새로운 여성의 길을 개척한 분들"이라며 "참전 여군들이 고령이라 기록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여군은 물론 군 전체 발전을 위해서도 '뿌리'에 대한 연구가 보다 활성화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지현 기자
양진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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