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자존심도 함께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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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자존심도 함께 무너졌다

입력
2020.06.22 18:00
수정
2020.06.2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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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
이충재주필


트럼프 '톱다운' 의존, 정세 판단 잘못
文ㆍ金 신뢰로 북한 후퇴 안할 것 오판
대미ㆍ대북라인과 시스템 쇄신 불가피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2018년  9월  청와대 여민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제공



북한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켰을 때 무너져 내린 건 콘크리트 건물만이 아니다. 남북관계 개선을 성원하고 지탱해 온 국민의 자존심도 함께 무너졌다. 북한의 '무례'와 '몰상식'은 한국 대통령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모욕감을 안겼다. 난데없이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황당함과 참담함, 그리고 분노를 느끼게 했다.    

북한의 도를 넘은 행태에 정부는 단호한 조치로 국민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줘야 한다. 지금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뭔가 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당분간 냉각기가 필요하다. 이참에  어디서부터 남북관계가 헝클어졌는지 면밀히 살피는 게 현실적이다.  

지난 2년간 진행돼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변곡점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였다. 순조롭게 나아가던 남북, 북미관계는 지난해 2월의 하노이 '노딜'로 곤두박질쳤다. 그 중요한 순간에 우리 정부는 정세 판단에서 결정적인 잘못을 했다. 회담 개최 전은 물론, 당일까지 정부는 미국 정부 내의 기류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낙관론에 사로잡혔다. 후일담이지만 당시 일본은 회담 결렬 가능성을 미국으로부터 미리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대미라인의 정보력 부재와 판단 미스는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톱다운 방식을 지나치게 믿은 것도 화근이다. 문 대통령은 17일  원로들과 만남에서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타결 직전까지 갔지만 미국 실무진 반대로 무산됐다"고 밝혔다.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회고록에서 언급했듯이  볼턴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트럼프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형국이었다. 트럼프의 환심만 사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믿은 것부터가 실책이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 한 대담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2018년 3월 정의용 안보실장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전하자 트럼프는 주변에 서 있던 참모들에게 "내가 뭐랬어, 내 말이 맞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정 실장에게 기자회견을 요청하면서도 백악관 참모 배석은 못하도록 막았다. 트럼프와 관료들 간에 갈등이 컸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트럼프 참모들이 북미관계 개선에 부정적이라는 것을 인식했다면 그들을 설득하는데도 공을 들였어야 했다.  

대미라인뿐 아니라 대북라인의 전략적 오류도 심각하다. 하노이 회담 실패 후 청와대는 미국에만 달려들었지 북한은 관심 밖이었다. 두 정상의 신뢰가 쌓였으니 북한이 뒷걸음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합의 사항의 이행은 소홀히 한 채  'DMZ 국제평화지대'같은 북한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엉뚱한 제안에만 힘을 쏟았다. 김정은이 백두산에서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자력갱생으로의 회귀를 선언하는 등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는 '한미 워킹그룹'만 붙잡고 있었다. 

기자는 총선 직후 '문 대통령 남은 2년, 인사가 먼저다'라는 칼럼에서 외교ㆍ안보라인 등 큰 폭의 개각 필요성을 주장했다. 외교안보팀의 무능과 안이함이 심각하다는 우려를 여러 곳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북한이 정 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의 특사 방북을 거부한 것은 이들에 대한  불신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봐야 한다. 두 사람은 '한반도의 봄'을 일구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남북관계의 달라진 판을 새롭게 짜기에는 역부족이다. 3년 넘은 재직으로 피로감도 크고, 이들의 대북ㆍ대미채널도 예전같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문 대통령은 사람에 대한 신뢰가 커 인사에서 실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북관계 위기도 인사 타이밍을 놓친 데서 기인한 측면이 있다.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된 지금은 인사의 적기가 아닐 순 있지만 사태가 진정되는대로  전면쇄신이 불가피하다. 새로운 진영과 함께 외교ㆍ안보 조직과 시스템, 대북정책의 방향까지 종합적으로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이 지도자의 역량이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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