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0년, 여군이 있었다> 2
참전 여군 얘기로 풀어본 6ㆍ25 당시 여성 생활상
"살려주세요."
1950년 10월 어느 날, 다리에 총탄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7세 여자아이를 들쳐 업은 한 여성이 경기 수원시 도립병원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9ㆍ28 서울 수복 전투 이후 인민군이 수원으로도 밀려 내려오자 하나 둘 피난을 떠나 병원에 남아있던 의사는 없었다. 당시 병원에서 약국 조제실 업무 보조를 맡고 있던 열일곱 여고생 이복순(87)씨는 "모녀를 보자마자 살려야겠다는 생각만 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피란 길을 준비하던 간호사 한 명에게 서둘러 연락을 취했다. 간호사와 함께 아이의 입에 수건을 물리고, 환부를 소독하고, 지혈제를 뿌리고, 다리를 잡아당겨 뼈를 맞추고, 부목을 대줬다. 엉엉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자 이씨는 "살았구나"라는 확신에 안도했다. 이런 장면을 수 차례 목격했던 이씨는 두 달 뒤 여자의용군 2기로 자원 입대했다. "자꾸 가족도 이웃도 다치고 죽어나가니 무섭더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나섰지."
참전 여군들이 기억하는 6ㆍ25전쟁은 결코 영화 같지 않았다. 그럴듯한 전투 장면이나 승리의 환호성 같은 기억도 없었다. 대신 한결같이 가족과 이웃의 아픔을 얘기했다. 여군들이 전쟁에 뛰어든 이유였다.
여자의용군 권경열(84)씨도 1951년 1ㆍ4후퇴 직후 목격한 '버려진 아이들'의 울음 소리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권씨는 서울에서 피란을 내려와 수원의 한 고아원에 잠시 머물렀는데, 아이를 버리고 피란을 떠난 부모, 목숨을 잃은 부모들이 많아 울음소리가 동네에 가득했다고 한다. 권씨는 고아원 원장과 함께 아이를 찾으러 다녔다. “아기를 포대기 채로 기둥에 묶어 놓고 간 사람도 있었어. 새벽에 나가면 애들을 7~8명씩 주워서 데려왔지.” 권씨는 이런 아픔을 끝내고 싶어 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1953년 2월 여군에 입대했다.
여군들이 최전선에서 나라를 지켰다면 대다수 여성들은 후방에서 '가정 전선'을 지켜야 했다. 당시 육군 9사단에서 각종 기록 작성을 담당했던 이씨는 "전사자는 물론 행방불명자가 너무 많아 기록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며 "(남자들이 없으니) 이삿짐을 싸 피난을 떠나거나,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건 집에 남은 여성들의 몫이었다"고 기억했다. 실제 당시 내무부 통계국 자료를 보면 전체 취업자 중 여성 비율은 1949년 35.6%에 불과했으나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4.6%로 9%포인트 급증했다.
그러나 참전 여군을 비롯해 사회에 진출했던 대다수의 여성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전쟁 당시에는 필요한 인력이었으나 전후엔 ‘억센’ 여자로 낙인 찍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다.
6ㆍ25가 여성의 삶에 미친 영향은 역설적라는 평가도 나온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참전을 비롯해 각종 사회 진출의 기회를 갖게 된 점에선 진보했으나, 가족의 생명과 보호를 책임지는 '전통적 여성성'이 더 굳어지는 기제로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22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쟁과 전투에 희생하고 헌신했던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간 것은 당시 시대적ㆍ사회적 한계"라며 "다만 여성 각자의 삶 속에선 의미 있는 경험이었고, 이런 경험이 모여 향후 여성 인권 신장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이 됐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