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먹은 약, 어느새 중독... 끊으니 더 큰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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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먹은 약, 어느새 중독... 끊으니 더 큰 고통

입력
2020.06.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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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치료 받으려다 중독돼
마약성 진통제 옥시코돈 부작용에 단약했지만
“2주 뒤 약 생각에 또 병원행”...  일부는 ‘약물쇼핑’도

편집자주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라는 믿음은 이제 옛말이 됐다. 지난달 말 대검찰청이 발간한 ‘2019년 마약류 범죄백서’를 보면, 지난해 마약류 사범은 총 1만6,044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증가율도 무려 27.2%였다. 공식 개념은 아니지만 통상 ‘1년간 인구 10만명당 마약사범 20명 미만’인 국가를 마약 청정국으로 일컫는데, 한국의 작년 수치를 환산하면 ‘10만명당 30명꼴’이다. 마약으로부터 결코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의 일상 속으로 마약이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 주소를 4회에 걸쳐 짚어본다.

지난달 7일 서울 종로구의 대형병원 인근 약국에서 환자가 처방약을 구매하고 있다. 이 약국은 마약 중독자들 사이에서 대용량의 마약성 진통제를 취급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한호 기자


박상규(가명ㆍ30)씨는 2017년 초 극심한 두통을 겪었다. 서울의 유명병원 3곳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참다 못한 그는 인터넷에서 ‘두통에 잘 듣는 약’을 검색했다. 마약성 진통제 ‘옥시코돈 염산염(성분명)’이 눈에 띄었다. 그 길로 평소 자신이 가장 자주 다니던 병원으로 달려가 이야기를 꺼냈다. 박씨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주치의는 옥시코돈 성분의 알약 40㎎짜리 10여정을 처방해 주면서 “하루에 1,2개만 먹으라”고 했다. ‘마약성 진통제’를  처음 접하게 된 순간이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영등포구 모처에서 만난 박씨는 “처음엔 순수하게 치료 목적으로 약을 먹었다”며 옥시코돈을 복용한 직후의 상황을 떠올렸다. “딱 한 알만 먹었을 뿐인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라고요. 하늘도 폭죽이 터질 때처럼 반짝반짝 빛나 보였어요. 그러다가 약에 취해서 잠이 들었고, 다음날 구토를 했어요.”

부작용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 박씨는 어느 순간부터 옥시코돈을 먹지 않았다. 처방 받아서 가져 온 약도 다 버렸다. 그런데 2주 정도 지나자 ‘신기하게도’ 옥시코돈이 머리에서 스멀스멀 맴돌았다. 용량과 용법을 어긴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미국 자료를 찾아보니, 보통 (단약 이후) 5일 정도 지나면 약 생각이 난다고 하더군요.”

옥시코돈을 구하려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한 알에 20㎎짜리를 처방해 주면서 1일 최대 복용량은 40㎎라고 했어요.  예전보다 절반 정도만 손에 쥐게 된 거죠." 박씨는 다른 병원들을 돌아다녔고, 세 곳에서 옥시코돈을 추가로 처방받았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40㎎짜리 한 알만 먹어도 구토를 했는데, 지난해 초쯤에는 하루에 200㎎의 옥시코돈을 투약하는 상황이 됐다. 서서히 약에 중독된 탓이다. 그는 “처음엔 약 기운이 빠지는 데 12시간이 걸렸는데, 나중에는 3~4시간 만에 사라졌다”며 “약효가 없어지면 감기몸살의 수십배나 되는 듯한 고통이 찾아와서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옥시코돈 복용, 이것 말고는 고통을 덜어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치료→부작용→단약→재발’ 악순환

사실 박씨한테 약을 끊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해 5월 그는 옥시코돈을 처방해 준 병원에 자진해서 입원한 적이 있다. 두 달간 매일 아침 구토가 반복되면서 몸에서 심각한 경고음이 울렸기 때문이다. 7일간의 입원 기간 중 ‘생 단약’(보조 수단 없이 약을 끊는 것으로, 중독자들 사이에서 쓰이는 말)을 시도했다. 결과는 실패. 이때부터 단약과 재발이 수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퇴원하자마자 박씨는 집에 남아 있던 옥시코돈에 손을 댔다. 2개월가량 계속 먹으니 또다시 부작용이 생겼고, 결국 다른 병원에 보름간 ‘2차 입원’을 하고 말았다. 두 번째 퇴원 이후는 그나마 좀 괜찮았다. 약 없이 8개월을 버텼지만 그는 올해 3월 또 무너졌고, 동네 병원을 전전하며 처방전을 받았다. 나흘 정도 옥시코돈을 복용하다가 다시 한번 단약을 결심하며 남은 약을 버렸다.

그러나 박씨의 몸은 이미 심각한 중독 상태였다. 약을 먹지 않으면 전신이 망치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몸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달 말에는 구급차로 응급실에 실려가기까지 했다. 현재 그는 밥은커녕 물만 먹어도 구토를 하는 지경이다. 다행히 탄산음료는 거부감이 적은 탓에 죽과 함께 콜라를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중이다. 애초 치료 목적으로 접한 약물이 ‘식사’라는 가장 소소한 일상까지 뒤흔들고 만 것이다.

중독자도 악용… “환자인 척하면 OK”

이처럼 평범한 의약품이 때로는 ‘마약 중독’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뒤집어 보면 마약류를 구하려 할 때 굳이 ‘어둠의 경로’를  택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약 중독자들로선 치료를 빙자하는 수법으로도 얼마든지 환각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고교 시절 호기심으로 마약에 손을 댄 이후, 지금까지 10개 이상의 마약류를 경험해 봤다는 김은희(가명ㆍ29)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7년 김씨는 서울 강남구의 한 병원에서 성인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 성분인 메틸페니데이트가 포함된 의약품 ‘페니드’를 처방받았다. 페니드가 환각 증세를 낳는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해 볼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페니드는 필로폰과 강도 차이만 있을 뿐, 뇌를 각성시킨다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어  향정신성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 있다. 김씨는 “병원에서 ‘ADHD 치료약을 처방해 달라’고 하니까 큰 문제 없이 받았다”며 “이전에 여러 차례 진료를 받아서인지 의심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옥시코돈에 중독됐던 박씨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다. 단약 중이던 지난해 9월, 시야가 흔들리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증상을 겪게 돼 인터넷을 뒤져 보니 ‘성인 ADHD일 수 있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평소 다니던 대형 병원 정신과를 찾았더니 메틸페니데이트 성분의 의약품(메디키넷)을 처방해 줬다. 그는 “진료실에 들어가서 1분 정도 간단한 설문조사를 마치자 곧바로 처방전을 내 줬다”고 말했다.

실제로 취재 중 만난 대다수의 마약 중독자들은 “많은 병원들에서 ADHD 치료약은 물리적 검사가 아니라, 간단한 대화와 설문조사만으로 처방해 주고 있다”고 전했다. 인터넷 등에서 얻은 지식으로 ADHD 증상을 흉내만 내도 간단히 약을 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약물 쇼핑'을 예방하려면 무엇보다 약을 처방하는 의료인들의 철저한 주의가 필요하다. 천영훈 인천참사랑병원 원장은 “처방 의약품을 투약한 뒤 약물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의인성(의사의 행위로 발생하는 결과) 환자로 봐야 한다”며 “처방에 앞서 환자에게 먼저 중독 위험성을 확실히 알리고, 향후에도 중독 진행 여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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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약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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