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북정책 난맥상' 볼턴 폭로 파장
방미 이도훈 본부장은 '빈손 귀국'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이은 전단 살포 예고까지 북한의 대남 공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미 당국은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도 성과 없이 끝났다. 특히 미국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폭로 파장으로 어수선하다. 즉흥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을 바라보다 남북관계가 길을 잃었다는 문제의식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와의 협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20일 별다른 성과 없이 귀국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21일 “이번 협의는 현재의 한반도 긴장이 더 고조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는 데 방점을 찍은 협의였다”며 “한반도 상황을 평가했고, 대응 방안에 대해서도 폭 넓은 토의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장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거나 상황을 반전시킬 묘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난해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교착상태인 북미 비핵화 협상은 볼턴 전 보좌관의 ‘그것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으로 인해 기존 성과마저 논쟁의 대상이 된 양상이다.
이날 본보가 확보한 볼턴 전 보좌관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치적인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정상회담부터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볼턴 보좌관은 트럼프 대통령을 두고 “개인적 이익과 국가적 이익을 구분하지 않았다”며 당시 북한에 유엔 제재 해제 검토 가능성을 시사했다고 주장했다.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싱가포르회담 당시 회담장을 떠나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유엔 제재 해제가 다음 순서가 될 수 있을지' 물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 질문에 ‘열려 있으며 이에 대해 생각해보길 원한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 역시 낙관적인 기대감을 안고 떠났을 것이라고 볼턴 전 보좌관은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울러 회담 자리에서 한미연합훈련이 비싸고 도발적이라며 반복적으로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훈련을 축소하거나 폐지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장군들을 무시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볼턴 전 보좌관은 폭로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정작 다음해 2월 하노이회담에선 ‘협상장 밖으로 걸어 나가기’, 즉 회담 결렬을 염두에 둔 것으로 전해졌다. 애초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해 자신의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의 의회 청문회를 지켜보느라 회담 직전 밤을 새웠고 “스몰딜(낮은 수준의 합의)과 (협상장) 걸어 나가기 중 어느 것이 더 큰 뉴스거리냐”라고 궁금해 했다고 한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걸어 나가기’가 극적이며, 추후 협상에서 더 큰 레버리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회담을 결렬시켰다는 얘기다.
볼턴 보좌관은 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3차 북미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결국 같은 해 6월 판문점 남ㆍ북ㆍ미 정상 회동이 깜짝 성사됐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특히 판문점 회동 당일인 2018년 6월 3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은 문 대통령의 판문점 회동 참석을 3차례 거절했다고 볼턴 보좌관은 회고록에서 전했다.
그는 또 회고록에서 싱가포르회담 직전인 2018년 5월 미국을 방문한 당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긴장해 친서를 차에 놓고 내리는 실수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볼턴 폭로 후 워싱턴은 혼돈 그 자체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 전 보좌관의 ‘리비아 모델’에 대한 북한의 반발이 지금 북미관계 교착으로 이어졌다며 그에게 책임을 돌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볼턴 전 보좌관이 많은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며 “미국을 해친 반역자”라고 거칠게 비판했다. 결국 6월 들어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고 있지만 미 외교당국은 트럼프-볼턴 공방에 휘말려 제대로 된 대응책 하나 내놓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미국에 기대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맞느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미국으로선 당장 북한과의 대화 재개 필요성이 없다. 제재 완화나 한미군사훈련 중단과 같이 북한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또 앞으로도 11월 대선 전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북한의 도발에는 초강경 대응도 예상된다. 볼턴의 이번 폭로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된다 해도 북미관계에서 이전만큼 운신의 폭이 넓지 않을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분위기다.
다만 볼턴 회고록 내용 자체가 일방적 주장이고 이미 알려져 있던 내용들인 만큼 지금까지의 비핵화 협상이나 북한과의 대화를 무위로 돌릴 필요는 없다는 제언도 있다. 볼턴 전 보좌관도 하노이에서 북미가 일종의 합의에 근접하기는 했지만, 김 위원장이 영변 외에 다른 사항을 제공하려 하지 않아 결렬됐다고 전했다. 북한의 현실적 판단, 미국의 단계적 해법이 맞아 떨어지면 향후 극적인 북핵 타협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 셈이다.
특히 한국의 외교적 노력이 이어지는 만큼 미국도 상황 관리를 위해 주변국과의 공조 방법을 찾아나갈 것으로 보인다. 한미 차원에서도 묘수를 찾기보다는 당분간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는 데 역점을 둘 것으로 관측된다.
이 본부장은 전날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하며 미국, 중국, 일본 간 대북 문제에 대한 조율이 있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계속 소통하고 있다”고 답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17일(현지시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과 회동했던 것도 의미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미중 긴장관계 완화뿐만 아니라 북한 문제 역시 논의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자문연구위원은 “북한이 한계를 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는 게 최선”이라며 “미국은 한국과 일본, 유럽, 혹은 중국,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상황 악화를 막을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 조치에 주력할 것 같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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