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신은 단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정관시집(Les Contemplations)’에 쓴 말이다. 위고는 그렇게 말했지만, 와인을 언제 어디서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여러 추측과 가설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늘 궁금하기는 하다. 와인을 누가 만들었을까.
◇술 취한 원숭이 가설
그러던 차에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술 취한 원숭이(The Drunken Monkey)’. 인간이 술을 마시고 알코올에 탐닉하는 이유를 찾아 나선 저자 로버트 더들리는 고고학 기록을 뒤지다 인간이 초기 영장류이던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알코올에 끌리게 되어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우리 조상 영장류는 나무 위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곤충을 잡아 먹다가 언젠가부터는 가지에 달린 과일을 주로 따 먹었다. 우리 조상들은 과일을 주식으로 먹는 다른 동물들과 먹이 경쟁을 하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녔을 것이다.
익은 과일은 당분이 많기에 소량일망정 알코올을 함유하고 있다. 효모가 과일의 당분을 먹고 알코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다 익은 과일이 물러지면서 나무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풍기는 미묘하기 짝이 없는 냄새가 나무 위에 있는 우리 조상을 유혹했으리라. 아마도 우리 조상은 이 냄새에 이끌려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서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지상에서 살아남기란 얼마나 힘든가. 우리 조상 역시 살아남기 위해 익은 과일을 잘 찾아내야 했다. 이왕 찾는 김에 붉거나 노란 빚을 가졌으며, 매력적인 냄새를 풍기면서도 맛이 더 좋은 과일을 구하러 숲을 돌아다녔으리라. 알코올 냄새를 잘 맡는다면 더 쉽게 잘 익은 과일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과일은 제철에만 먹을 수 있었다. 구할 수 있을 때 실컷 먹어두어야 했다. 그러니 알코올 섭취량이 자연스레 많아졌다. 요즘에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길을 걷는 게 위험하지 않은가. 당시에 그러다가는 다른 포식자에게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잡아먹힐 위험이 항시 도사렸다.
여기서 우리 조상은 놀라운 능력을 갖추게 된다. 알코올 분해 능력을 키운 것이다. 생존을 위해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더 많은 알코올을 섭취하고도 더 빨리 분해시키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분자 진화학자 캐리건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 고릴라의 조상들의 알코올 분해 능력이 다른 영장류들에 비해 40배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인류는 알코올 친화적이 되어 자연스럽게 알코올에 끌리게끔 유전자가 진화되었다. 이러한 주장이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이다.
이 책을 읽자니 필자는 이 방면으로 진화가 무척이나 잘된 듯싶다. 알코올이 있는 곳으로 자꾸만 눈길이 가 닿으니 말이다. 하지만 원고를 쓰는 동안에도 이미 와인을 마시고 있는 내 마음을 설득해 다른 상상을 해 본다.
◇구석기인 비너스의 와인
알코올에 끌리는 유전자를 이어받은 구석기인들은 알코올 냄새가 이끄는 곳을 찾아 킁킁대며 다녔으리라. 수풀 사이에 놓인 바위틈에서 잘 익은 과일을 하나 발견한다. 달고 과즙이 많은 과일을 한 입 베어 물고는 기분이 좋아져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리라.
어느 날은 누군가가 그러모았거나, 아니면 우연히 쌓인 과일에서 흘러나온 즙이 고여 자연 발효된 액체, 곧 술을 맛보았으리라. 술의 그 미묘한 냄새와 맛처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지 않았을까. 같은 맛을 내는 액체를 찾으려고 온 숲을 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포도가 자연 발효된 액체를 맛보았을 것이다.
포도는 다른 과일에 비해 당분이 현저히 높고 껍질에는 효모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뿐이랴, 산과 타닌이 함유되어 있어 다른 ‘과일 액체’에 비해 ‘포도 액체’는 더 복합적이고 신비로운 맛이 난다. 그러니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이 옳다면, 분명 와인을 더 먹고 싶어 찾아 다녔을 게 분명하다.
와인은 이렇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술을 보관할 수 없었던 구석기인들에게 와인은 1년에 단 며칠만 맛볼 수 있었던 무척 귀한 술이었다. 그러니 와인을 발견한 날에는 뿌듯함과 행복감이 얼마나 컸겠는가(필자도 이 느낌을 잘 안다). 얼콰한 기분으로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바위에 새기고, 춤추고 노래했으리라.
구석기 시대 유물 가운데 ‘로셀의 비너스’란 부조가 있다. 프랑스 도르도뉴의 라스코 동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로셀 절벽에 조각된 비너스 상으로, 그 손에는 뿔잔이 들려 있다. 이 뿔잔에 무엇을 담아 마셨을까. 술을 담았다 물을 담았다 추측도 하지만, 악기라고도 하고 여성을 상징하는 달을 뜻한다고도 한다. 다만, 잔 모양의 형체가 손에 들려 있으니, 술을 담아 마셨으리라는 주장이 필자의 마음에도 쏙 든다. 특히 와인으로 추측하는데, 최초의 술이 꿀발효주(미드)와 와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석기인들이 와인을 만들었을까? 안타깝게도 뿔잔만으로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다만, 구석기 시대에도 야생 포도가 있었으니 자연 발효된 와인도 있었으리라.
와인이 발견되었다는 설에 무게를 실어주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잠시드 왕의 전설
고대 페르시아에는 잠시드라는 이름의 왕이 살았다. 그는 포도를 무척 좋아했는데, 다음 해 포도 수확 때까지 포도를 먹기 위해 여러 단지에 나누어 담아 보관했다. 그런데 단지 하나의 포도 맛이 이상했다. 그는 단지에 ‘독’이라고 표시한 뒤 접근을 금지시켰다.
하루는 하렘(여성의 처소)에 있는 한 여성이 심한 두통으로 괴로워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독’ 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단지 속에는 알맹이가 터져 포도즙이 흥건한 위로 포도껍질이 떠 있었다. 그녀는 즙을 따른 뒤 눈을 질끈 감고 마셨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며 그대로 자리에 누워 죽음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잠에서 깨 두 눈을 번쩍 떴다. 괴로움에 몸서리치게 한 두통이 어느새 말끔히 사라진 게 아닌가. 게다가 몸은 한없이 가볍고 가뿐했다.
그녀는 자초지종을 잠시드 왕에게 고했다. “이러하오니, 전하께서 독이라 표시해둔 단지의 포도즙은 분명 명약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잠시드 왕은 포도를 더 많이 보관해 ‘명약’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연히 발견한 와인을 인간은 언제부터 적극 개입해 만들었을까.
◇아라라트 산의 노아
인간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와인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성경’에 있다. 바로 방주를 만든 노아에게서 와인이 비롯했다. 성경에서는 노아를 처음으로 포도 농사를 지은 농부이자 양조자로 기록하고 있다.
대홍수가 끝난 뒤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 산에 멈춘다. 노아는 그곳 일대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여러 작물을 길렀겠지만, ‘성경’에는 포도 농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창세기 9:20-21). 이 구절을 보면, 노아는 최초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취중 실수를 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고학자들이 최근까지 발견해 연구한 내용에 따르면, 와인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 노아의 방주가 멈춘 아라라트 산 인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의 아나톨리아 지방(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소아시아 지역. 오늘날의 터키반도)과 조지아, 아르메니아, 이란 사이 어디에선가 와인이 처음으로 양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와인 관련한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와인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조지아다. 기원전 6000년, 즉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에 와인을 빚은 것으로 보이는 항아리(크베브리)가 2017년에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화학자들이 크베브리 안의 잔여 유기물 성분을 조사한 결과, 포도에서 많이 발견되는 주석산(타르타르산)이 대량 검출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크베브리를 땅에 묻은 뒤 그 안에서 와인을 발효시켰으리라.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양조용 포도씨앗도 발견되었다.
이 외에도 소아시아의 아르메니아와 이란, 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와인을 만든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란의 자그로스산맥 신석기 유적 중 기원전 5000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북부 핫지 피루즈와 고딘 테페에서 발견된 9리터 용량의 단지 6개에서는 포도즙과, 부패와 산화방지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송진이 발견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아레니 동굴(Areni-1)에서도 기원전 41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포도즙을 짜고, 발효통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구멍 뚫린 얕은 대야와 항아리 등 제법 양조 시설을 갖춘 흔적이었다.
아직까지 발견된 흔적으로만 본다면 조지아에서 시작된 와인이 이란과 아르메이니아를 거쳐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따라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레바논 등 여러 도시들과 레반트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라트 산뿐만 아니라 그리스신화의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가 포도나무를 발견해 와인을 빚은 니사 산도 바로 소아시아의 어디쯤이다. 잠시드 왕이 다스린 고대 페르시아도 그 일대 어디쯤이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과학적 발견이 동일한 곳을 가리키는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앞으로 어디서 더 오래된 흔적이 발견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 허난성 자후 신석기 유적에서도 와인과 유사한 술을 만든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7000년 이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 파편의 성분을 분석하니, 포도나 산사나무 열매에서 나오는 타르타르산과 꿀과 곡물 성분이 검출되었다. 과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발견된 혼합주(와인은 아니다)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추정한다.
◇신의 물방울, 인간의 물방울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인류는 정착 생활을 시작해 농사를 짓고 도기를 만들어 빚은 와인을 보관했다. 포도는 최소 2년을 기다려야 열매를 맺기 때문에 유목 생활을 하면서 포도나무를 돌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까닭에 역사학자들은 술(와인)이 정착 생활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들은 와인을 만들어 마셨을 뿐만 아니라 음악을 듣고 연주하며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고 고대 와인 연구가인 페트릭 E. 맥거번은 ‘술의 세계사(Uncorking The Past)’에서 말한다.
와인은 이후,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로 로마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역사가 이럴진대, 필자가 알코올에 온전히 끌리는 까닭은 우연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필연에 있음을 알겠다. 그러니 신은 물을 창조했고, 인간은 와인을 발견해 만들었고, 필자는 찾아 마실 따름이다!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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