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를 먼저 찾아간 건 제갈량…삼고초려는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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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를 먼저 찾아간 건 제갈량…삼고초려는 허구다

입력
2020.06.20 08:17
수정
2020.06.20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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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42>후베이 ②샹양의 고융중과 징저우의 관우사ㆍ관제묘


징저우 관제묘 삼의루에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 동상이 세워져 있다. 관우는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영웅으로 추앙받는 중국 삼국시대 대표적 인물이다.

우한에서 서북쪽 약 330km 거리에 위치한 샹양(襄陽)으로 간다. 시내로 장강의 최대 지류인 한강이 흐른다. 강 남쪽 워룽진(臥龍鎮)에 삼국시대 제갈량이 살았다. 2003년 11월 제갈량의 호인 와룡으로 마을 이름을 변경했다. 원래 니쭈이(泥嘴)였다. 룽중촌(隆中村)도 있는데 주로 주민이 거주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 중국의 5A급 관광지인 고융중(古隆中)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석패방이 나타난다.


후베이성 샹양시의 고융중 패방. 융중은 제갈량이 기거했던 곳으로 유비가 책사로 모시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았다는 곳이다.

고융중 편액은 청나라 광서제 시대에 진유주(陳維周)가 썼다. 기둥 양쪽의 대련도 그의 글씨다. 오른쪽에는 ‘세 번이나 찾아와 얻은 천하의 계책’이라는 삼고빈번천하계(三顧頻繁天下計), 왼쪽에는 ‘두 왕조를 도운 신하의 마음’이라는 양조개제노신심(兩朝開濟老臣心)이라 적혀 있다. 제갈량의 일생을 아주 간명하게 상징하고 있다. 이 글은 당나라 두보의 시 ‘촉상(蜀相)’에서 인용했다. 촉나라의 수도 청두에서 초당을 짓고 살던 그는 제갈량 사당을 찾아 존경의 뜻을 담았다. 마지막 구절은 애절하다. ‘출사해 북벌을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니 역대 영웅들은 옷고름을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렸네’라고 했다.


피서산장의 강희제의 친필 ‘담박경성’

제갈량의 또 다른 걸작 계자서(誡子書)의 한 대목인 담박명지(澹泊明志)와 영정치원(寧靜致遠)도 새겨져 있다. 어린 아들에게 남긴 훈육이다. 86자의 짧은 글이지만 오랫동안 회자하고 있다. ‘욕심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뜻을 굳게 세우고’ ‘평온한 마음으로 포부를 펼친다’는 뜻이다. 원문은 서한 시대 유안이 편찬한 회남자(淮南子)다. 제갈량은 계자서에서 ‘담(澹)’ 대신 ‘담(淡)’이라 썼는데 뜻은 대동소이하다. 청나라 강희제는 피서산장에 있는 전각에 친필로 ‘담박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담박경성(澹泊敬誠)을 썼다. 강희제는 계자서가 아닌 회남자를 인용한 듯하다.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한제갈승상무후사(漢諸葛丞相武侯祠)가 나온다. 석사자 두 마리가 지키고 있고 담백한 담장과 아담한 대문이 보인다. 동한과 촉한에서 관리를 역임한 제갈량은 유학자였다. 한나라의 복원을 위해 세상에 나왔기에 유비와 정치적 목표와 지향이 서로 달랐다. 어떤 학자는 심지어 정적이었다고 표현한다.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아마도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정계를 은퇴하지 않고 그토록 필사의 노력으로 북벌을 추진한 이유는 위나라를 토벌하기 위해서다. 소설 ‘삼국지’의 줄거리를 머릿속에서 조금 비우면 제갈량이 새롭게 보인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행정가였지 마법처럼 ‘동풍’을 일으키는 책사는 아니었다.


무후사


무후사 안의 제갈량 동상과 ‘와룡유지’ 편액.


제갈팔괘촌의 사당.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우아한 모습으로 깃털 부채를 들고 있는 제갈량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2002년 저장성 란시(蘭溪)의 제갈팔괘촌(諸葛八卦村)에서 보내왔다. 제갈팔괘촌은 팔괘 구조로 꾸며진 골목으로 이뤄진 마을이다. 제갈량의 후손이 사는 집성촌이다. 연못 옆에 자리 잡은 사당에 제갈량 동상이 있다. 두 장소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니 놀랍다. 고융중과 팔괘촌은 무려 1,000km나 떨어져 있다. 1,800여년의 세월만큼이나 먼 거리다. 동상 위 와룡유지(臥龍遺址)는 후베이 출신으로 국가부주석을 역임한 둥비우(董必武)가 썼다.


‘삼고유적’과 궈모뤄가 쓴 출사표(좌), ‘지혜현숙’과 제갈량 부인.


아들, 손자와 함께 있는 제갈량.

옆에는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한 팡이가 쓴 삼고유적(三顧遺蹟)이 있다. 그 아래에 유리로 보호한 서체는 제갈량의 출사표로 문학가이자 초대 중국과학원 원장을 역임한 궈모뤄의 작품이다. 제갈무후(諸葛武侯)가 걸린 건물에는 사마의의 찬사인 천하기재(天下奇才) 편액이 보인다. 치열하게 싸운 맞수가 보낸 아름다운 평가다. 결국, 전투에서 이긴 사마의가 ‘기재’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자랑이기도 하다. 제갈량과 아들 제갈첨, 손자 제갈상이 함께 있다. 제갈량의 부인 황월영도 만날 수 있다. ‘부인을 고르려면 제갈량을 따라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소설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추녀라고 썼기 때문이다. 지혜현숙(智慧賢淑) 편액은 마오쩌둥과 장칭 사이에 태어난 딸 리너(李訥)가 썼다.


삼고당의 장비, 유비, 관우 상.

삼고당이 있다. 제갈량은 지금의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숙부를 따라 형주로 왔다. 숙부도 사망하자 융중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도 힘썼다. 이때 유비가 찾아왔다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삼고초려(三顧茅廬)다. 유비와 제갈량은 천하의 계책을 문답으로 주고 받았다.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와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는 계책, 일명 융중대(隆中對)다. 제갈량이 ‘대권’의 뜻을 지닌 유비에게 제안했다. 관우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뒷전이었고 장비는 불평이 심했다. 과연 사실일까?


삼고당의 제갈량과 관우, 장비 상.

정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아 논쟁이 많다. 서진(西晉)의 역사가인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의 출사표(出師表)에 짧게 남았을 뿐이다. 삼고신우초려지중(三顧臣于草廬之中), ‘신이 사는 초가집에 세 번 찾아왔다’라는 말이다. 유비가 사망한 후 북벌의 결의를 적은 글에 등장한다. 민간에서 ‘영웅 만들기’가 극성을 부렸다. 당나라, 송나라 시대를 거치며 집단 창작이 이뤄졌다. 문인들도 가세했다. 원나라 시대는 본격적으로 이야기 구조가 생겨났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자 나관중(羅貫中)은 상상의 나래를 펴 소설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청나라 시대 모종강(毛宗崗)은 더욱 부풀려 드라마틱한 소설로 업그레이드됐다. 삼국지 유적 앞에 서면 정사로도 보고, 또 소설로도 봐야 한다. 머리가 복잡해지지만 재미도 있다.


삼고당의 유비와 제갈량.

삼고초려는 허구다. 삼국시대 인물 어환(魚豢)이 남긴 ‘위략(魏略)’과 서진의 역사가 사마표(司馬彪)가 집필한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적힌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진수의 ‘삼국지’도 인용했다.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주민이던 제갈량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형주 자사인 유표가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제갈량은 인근 번성(樊城)에 머물던 유비를 찾아갔다. 207년, 첫 만남은 이랬다. 유비는 나이 어린 제갈량을 보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제갈량은 조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북방 유민을 받아들여 세수를 늘리고 군사력도 증진하는 방안을 설명했다. 유비는 그때서야 이름을 묻고 ‘와룡을 알아봤다’고 했다. 제갈량이 스스로 정치판에 발을 들였다는 기록이다. 오히려 조조가 삼고초려를 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금은보화를 들고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았다. ‘이렇게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산에 묻혀 사는 평민을 산다면 멸시당하지 않을까 두렵지 않은가?’라는 제갈량의 말에 쓸쓸히 돌아갔다는 설정이다. 조조의 삼고초려, 상상은 자유가 아닌가?


재현한 제갈초려. 뭔가 부실해 보인다.


재갈초려 내부.

궈모뤄가 쓴 제갈초려(諸葛草廬) 대문은 초가집 분위기를 내려고 했는지 다소 허술하다. 방도 지극히 검소하다. 고융중은 1932년 장제스가 투자해 중건했다. 삼국시대 이후 사마의를 비롯해 역대 황제, 문인, 무인까지 너도나도 제갈량에게 무수히 많은 찬사를 쏟아냈다. 물론 제갈량만 아니라 민간이 영웅으로 대접하는 인물이면 더욱더 그렇다. 장제스에게 북벌에 실패한 영웅 제갈량은 어떤 존재였을까? 장제스도 제갈량 같은 책사가 필요했을까? 초당에 앉아 한참 동안 소설과 정사를 따라 제갈량을 생각한다.

남쪽으로 200km 떨어진 거리에 징저우(荆州)가 있다. 역시 삼국지의 현장이다. 소설과 달리 적벽전투에서 조조군은 역병이 발생해 그냥 돌아갔다. 아마도 주유는 조조가 물러간 후 화공을 펼쳐 승리했다는 전적을 남기려 했는지도 모른다. 유비도 삼국의 요충지인 형주를 손쉽게 임대했다. ‘맹장’이자 ‘형제’인 관우에게 통치를 맡긴다. 소설 전반부에 충직하고 용맹스러운 무장으로 등장한 관우는 형주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다. 삼국지 독자는 그의 죽음에 실망했다. 그렇게 몸은 당양(當陽)에, 수급(머리)은 뤄양(洛陽)에 묻혔다. 제왕의 위상을 얻었고 중국 전역에 관제묘(關帝廟)가 건축됐다.


징저우의 형주고성 성문.

고성은 해자로 둘러싸였고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다. 다른 고성에 비해 아주 번화하다. 주민도 많이 살고 시장이나 식당, 백화점 등도 많다. 역사문화 유적지도 많아 관광 차량을 이용해 유람할 수 있다. 동문에서 출발해 성벽 도로를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종점인 남문까지 운행한다.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니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징저우에는 관우와 관련된 사당이 두 곳이다. 관우사(關羽祠)와 관제묘다.


관우사 정전의 ‘만세인극’ 편액.


관우 고향인 하이저우에 있는 관제묘에는 청나라 함풍제가 쓴 ‘만세인극’ 현판이 걸려 있다.

관우사는 명나라 초기에 관우를 기념하기 위해 처음 세웠다. 대중소설로 인기를 끌던 시절로 짐작된다. 야트막한 세자산(卸甲山)에 세워 33개의 계단을 오르면 정전이다. 만세인극(萬世人極) 편액이 걸렸다. 역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에 대한 극진한 평가다. 관우의 고향 하이저우(解州)에 있는 관제묘에는 청나라 함풍제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만세인극’은 대략 17세기 전후 명나라 만력제 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민간에서는 점차 관공(關公), 관성(關聖), 관제(關帝)로 존칭했다. 청나라 이전까지 최고의 무인으로 쌍벽을 이룬 인물은 관우와 악비였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에 악비는 잊혀 갔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만주족은 뿌리가 같다. 당연히 항금 영웅을 홀대했다. 민족연합 국가, 중화주의를 강조하는 현대 중국도 마찬가지다.


관우사 정전의 관우와 두 아들 관평과 관흥.


관우사 배전의 전가복.

관우와 두 아들인 관평(關平)과 관흥(關興)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관평은 관우와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함께 참수된다. 관흥은 제갈량의 총애를 받다가 북벌 과정에서 병사한다. 정전 옆 동쪽 배전에 관우 일가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관우를 중심으로 부모와 부인 호씨, 첫째 아들 관평과 며느리이자 조운의 딸 조부인, 그 사이에 낳은 손자 관월(關樾), 둘째 아들 관흥과 전설 속에 등장하는 딸인 관은평(關銀屏)까지 4대, 모두 9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렇게 온 가족이 모인 모습을 전가복(全家福)이라 부른다.


관우사의 다섯 촉한 영웅 상반신 동상.


관우사 정자 속의 적토마.

바깥으로 나오면 촉한의 영웅이자 소설 주인공 다섯 명의 상반신 조각상이 있다.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운이다. 바로 옆 정자 안에 적토마가 있다. ‘인중여포(人中呂布)이고 마중적토(馬中赤兔)’라는 말이 전래한다. 적토마는 여포의 상징이다. 토끼 토(兔) 자를 썼지만 뜻은 호랑이 토(菟)에 가깝다. 토끼처럼 빠르다는 것보다 호랑이의 용맹이 어울린다. 정사에도 여포가 타고 전장을 누빈 말로 기록하고 있다. 이 멋진 말을 소설에서 일찍 버릴 수 없었다. 조조는 여포를 죽인 후 적토마를 관우에게 선물했다. 소설 덕분에 관우가 수염을 휘날리며 호랑이처럼 달리는 말을 타고 싸우는 멋진 장면이 연출될 수 있었다. 여포와 함께 사라진 적토마가 관우 사당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이유다.


관제묘의 ‘위진화하’ 편액.

관우사에서 천천히 약 20분을 걸어가면 관제묘가 있다. 명나라 개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396년에 처음 건축됐다.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쳤고 일본군의 침탈로 다시 훼손됐다. 1987년에 청나라 건륭제 시대의 기록을 참고해 복원했다. 그래서 정전에 청나라 동치제의 친필인 위진화하(威震華夏)가 걸려 있다. ‘중원에서 위세를 드높인’ 관우에 대한 찬사다. 건물 안에 도금된 관우가 앉아 있고 관평과 주창(周倉)이 서 있다. 관우와 관평이 동시에 사망한 후 ‘의리의 사나이’ 주창은 자살한다. 주창도 정사에 나오지 않는 가상의 인물로 창작된 캐릭터다. 아무렴 어떤가? 의연하게 관우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관제묘의 관우 상과 ‘건곤정기’ 편액.


관제묘 삼의루의 유비, 관우, 장비 상.


줘저우의 도원결의 현장의 유비, 관우, 장비 형상.

관우 머리 위로 청나라 옹정제의 친필인 건곤정기(乾坤正氣) 편액이 빛나고 있다. ‘온 천지에 떨친 굳센 기개’라니 황제도 분명 소설을 알고 있었다. 백성들이 신으로 봉공하는 관우를 어찌 가벼이 평가할 수 있겠는가? 통치에 활용하려면 멋진 말로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었으리라. 정전을 지나면 이층의 삼의루(三義樓)가 나온다. 전각 마당에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가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설 기세다. 관우의 캐릭터는 충성과 의리다. 충의천추(忠義千秋) 안에는 도원결의의 주인공 셋이 나란히 앉았는데 건물 안이라 조금 답답하다. 세 사람이 형제의 결의를 맺은 곳은 줘저우(涿州)에 있는 장비의 집 뒷마당이다. 비록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아도 한날한시에 죽자고 술잔을 높이 들고 있는 조각상은 정말 실감 난다.


관제묘 삼의루에 걸린 ‘충의천추’ 편액과 기둥에 적힌 대련.

하이저우에서 태어나, 줘저우에서 군인이 되고, 징저우를 지켜, 평생 쌓은 명성을 온 세상에 전했네(生在解州, 投軍涿州, 鎮守荊州, 一生英名傳天下). 유비에 충성했고 조조를 벗어났으며 손권과 절교했네, 삼분 후 머지않아 강토는 다시 하나가 됐네(效忠蜀主, 放走魏主, 絕交吳主, 三分難久圓金甌).

바깥으로 나오면서 문 앞 기둥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글씨가 슬쩍 스쳐간다. 너무 작아 그냥 지나치기 쉽다. 오랜 기행의 덕분인지 눈길을 끌었다. 소설과 정사를 거듭 떠올리며 글자 하나하나 메모지에 적었다. 오른쪽 기둥에는 관우의 일생을, 왼쪽 기둥에는 관우에 대한 평가를 개괄하고 있다. 차분히 쓰느라 시간이 꽤 걸린다. 누가 언제 쓴 글씨인지 몰라도 필체가 예쁘다. 민간에서 지지하고 소설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관우가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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