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 핑계로 법 제정 미뤄왔던 정치권 화답할까
‘성적 지향’을 포함한 차별금지법 제정에 국민 10명 중 9명이 찬성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2007년 법무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첫 입법 예고를 한 이후 14년째 정치권에선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법안 통과를 미뤄왔는데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15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1대 국회 개원에 맞춰 발표한 ‘21대 국회, 국민이 바라는 성평등 입법과제’에 따르면 응답자 중 87.7%가 ‘성별ㆍ장애ㆍ인종ㆍ성적지향 등 다양한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는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가 전국 만18~69세 성인남녀 1,500명(남성 760명, 여성 740명)를 대상으로 지난 달 14일부터 일주일간 전화응답방식으로 조사한 결과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남녀를 구별 없이 고르게 찬성했다. 여성이 89.8%로 남성(85.7%)보다 소폭 높을 뿐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매우 동의한다’는 비율도 54.1%(여성 57.2%, 남성 51.0%)로 남녀 모두 절반 이상이었다.
이는 그동안 차별금지법 제정 필요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6명이 ‘필요하다’고 답한 것보다도 찬성율이 훨씬 높아진 것이다. 보수 개신교계가 조직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운동을 벌이던 2013년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은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에 59.8%가 ‘필요하다’(반드시 필요하다 31.9%, 대체로 필요하다 27.9%)고 답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월 KBS가 전국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64%에 머물렀다.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율은 낙태죄 폐지 찬성율보다도 높았다. ‘낙태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을 전면 폐지하고, 낙태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문항에 응답자 중 82.0%가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낙태 처벌 조항은 이미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고, 올해까지 관련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낙태죄 폐지에 여성은 87.1%, 남성 77.0%가 찬성한다고 밝혀 남녀 찬성율 차이는 10%에 달했다.
차별금지법은 그간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줄기차게 제정이 요구돼 왔으나 “‘성적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 제정은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보수 개신교계의 조직적인 반발에 부딪쳐 번번히 미뤄졌다. 그간 정치권도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더이상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법 제정을 미루는 것은 궁색하다는 지적이다. 조혜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한국의 차별금지법 반대 주장은 차별금지법의 적용을 받을 구성원 일부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어서 문제였던 것이고,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을 마치 여러 사람이 찬성해줘야 하는 법인 것처럼 정치권에서 말해온 것도 문제”라며 “더 이상 정치권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는 차별문제나 갈등이 더 심해질 뿐이라는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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