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와 연이은 불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전쟁범죄 의혹 조사를 허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재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기후, 무역, 군사, 보건 등 이슈에 이어 이번엔 인권을 고리로 자신의 정책과 맞지 않는 국제기구를 또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아프간 전쟁 관련, 미군과 정보요원들의 전쟁범죄 가능성을 조사하는 ICC 인사들을 상대로 경제적 제재와 여행 제한을 승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미 국무장관은 자국 요원 조사나 괴롭힘, 억류에 관여한 ICC 관계자의 미국 내 금융자산을 동결하고 입국을 막을 수 있게 됐다.
ICC는 앞서 3월 아프간 전쟁 당시 미군과 미 중앙정보국(CIA), 아프간 당국, 현지 무장반군 탈레반 등의 전쟁범죄 의혹을 소속 검찰이 조사할 수 있도록 최초로 허용했다. 파투 벤수다 ICC 검사장은 2017년 재판부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미군이 2003~2014년 최소 54명의 억류자에게 강간ㆍ고문 등 잔혹행위를 했고, 폴란드와 루마니아, 라트비아에 있던 CIA 요원들도 최소 24명에게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미 CNN방송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처우에 관한 ICC 조사 가능성도 이번 행정명령 발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ICC는 전쟁ㆍ반인도적 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심리하고 처벌할 목적으로 2002년 설립된 국제기관이다. 한국을 비롯해 123개국이 참여하고 있지만 미국과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은 가입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의 경우 해외 전장에 파견한 군인이 많아 ICC가 미군을 정치적 목적으로 기소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가입을 극구 거부하고 있다.
미 외교ㆍ안보 책임자들도 이날 ICC를 맹비난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ICC가 인민재판식 ‘캥거루 재판’을 진행한다”고 비판했고,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불법적 조사는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윌리엄 바 법무장관은 “러시아 등 외국 세력이 ICC를 조종하고 있다”며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ICC는 즉각 유감을 표명했다. ICC는 성명에서 “미국이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조사와 사법절차를 집행하는 인사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목표를 공언했다”고 지적했다. 유럽도 반대 목소리를 냈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ㆍ안보대표는 “ICC는 모든 나라의 존중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며 15일 예정된 EU 외교장관 화상회의에서 이 문제를 의제로 다룰 가능성을 시사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만 “이 법정(ICC)은 정치화됐다”면서 미국을 지지했다.
트럼프 행정부와 국제기구간 마찰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AP통신은 “이번 조치는 국제기구 및 국제협정, 합의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 중 가장 최근의 일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기후변화협정, 중거리핵전력(INF)조약, 유엔 인권이사회 등에서 탈퇴했고, 최근 세계보건기구(WHO)에도 “지원금과 관계를 끊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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