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중(139)] 해외입국자의 2주 격리
‘#덕분에…당신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건 지침을 잘 따르는 것뿐’에서 이어집니다.
여행은 언제 어떤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길이다. 배 아프도록 웃다가도, 갑작스러운 풍랑으로 난파되는 배에 실리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이라 설레고, 몰라서 두렵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지난달 1일 귀국해 14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우리에겐 또 다른 의미의 여행이었다. 인생이란 어차피 여행이니까.
제주에 둥지를 튼 건 4년 전, 개인적인 혼란이 있었다. 시간이 넘치게 많았다. 정오가 지날 즈음이면 밥벌이를 위한 하루 일과가 끝났다. 시간의 물량이 달라진 기분이다. 의뢰인과 통화하거나 동료의 보고를 받다가 오후 늦게야 일이 끝나는 게 정상인데. 심리적으로 뭔가를 더 해야 했다. 뒷마당을 가꿔 볼까? 그런데 이게 내 일인가? 청소를 할까? 그걸 꼭 지금 해야 하나? 미팅, 통화, 술자리, 카페에서의 수다가 사라진 자리에 불안이 남았다. 딱히 바쁜 일이 없어도 바빠야만 했던 서울살이에 익숙해진 부작용이었다. 남들만큼이나 나도, (머릿속에선) 제주 사는 내가 부러웠다. 시간은 남아도는데 맘은 그게 아니었다. 밤이 성급히 찾아오던 ‘워커홀릭’에겐 오히려 안절부절 못하는 하루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맞이한 일요일 아침, 한 달 넘게 비공식적으로 자가격리를 했던 칠레의 비야리카가 아른거렸다. 당시 행동 반경은 300m를 벗어나지 않았다. 문밖이 먼 삶이었다. 날로 심각해지는 코로나 사태에서 여러 사연들이 SNS 글 타래를 채우고 있었다.
그중 중동을 무대로 활동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사진작가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국경이 닫히기 딱 4시간 전 무사히 집으로 귀환했고, 폐쇄 조치가 내려진 낯선 고향을 만났다. 그리고 갑자기 앓아누웠다고 했다. 5일간 가족과의 교류도 끊고, 일도 손을 놓았다. 왜 살아야 하느냐는 통증에 시달렸다. 집에서 일하는 삶이 익숙한, 먹고 사는데 문제 없는 프리랜서였음에도 말이다. 병명은 ‘우울’이었다. 묵묵히 정원에 물을 주는 어머니를 보고 나서야 그는 침대 밖으로 벗어났다. 가족과 함께란 행운, 자기 눈을 가리던 행복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 대유행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검은 그림자를 드리울지 모른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했다. 제주에서 14일간의 ‘집순이’ 삶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 내게 찾아왔던 손님도 그 녀석이 아니었을까.
자가격리가 시작된 첫날, 이런저런 공상을 깨며 휴대폰이 아침부터 세차게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다.
“저 제주시청의 자가격리 담당 공무원인데요. 오늘 생필품이 갈 거예요. 집 밖에 나가시면 안되고요…(중략)”
자가격리를 시작하면서 낯선 번호를 받지 않는 습관을 버렸다. 누가 어느 시간대에 전화를 걸어올지 알 수 없어서다. 또 다른 낯선 번호는 생필품 배달 전화였다. 볕 좋은 주말에 일을 만들어 송구스러웠다. 보급품을 보니, 숨을 구멍을 찾아야 했다. 대형 트럭에서 내려진 뚱뚱한 박스가 마당 안으로 수 차례 들어왔다. 쌀을 비롯해 장류와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밀봉 포장한 식품, 밑반찬 통조림류, 제주 특산 과자까지 건강과 애정과 고민이 섞인 보급품이었다. 격리자가 2인이다 보니 곱절로 풍족해진 살림이다. 감사한 ‘협박’ 같았다. 격리통지서 수령증에 사인하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을 감출 길 없었다.
‘이렇게 받고도 나가면 내가 미친놈이다.’
생필품과 더불어 자가격리 생활수칙용 쇼핑백이 건네졌다. 안내문과 마스크, 체온계, 쓰레기 폐기물용 특수 비닐, 살균 소독제가 담겨 있다. 해외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자가격리자를 추적하는 알고리즘이었다. 격리 기간 중 목욕탕에서 잡힌 사람, 금단 증상을 이기지 못하고 편의점에 담배 사러 갔다가 벌금을 문 사람 등의 뉴스를 들은 바 있다. 몸에 특수 칩이라도 박는 걸까? 휴대폰을 두고 나가면 어떻게 아는 거지?
자가격리자는 매일 두 번 자가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자가진단과 자가격리자 안전보호 앱을 통해서다. 발열과 호흡기 증상 등 4가지 문구에 답을 하면 된다. 담당 공무원은 오전 9시, 오후 4시 전에 앱으로 보고하길 원했다. 열 수치와 함께 오늘의 무증상을 체크 박스에 표기한다. 성실히 수행했으나 앱 오류가 잦은 모양이다. 담당 공무원이 앱 응답을 받지 못하거나, 밤새 우리의 위치가 추적되지 않아 비상이 걸렸다며 전화가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공무원은 안부를 물으며 외출 금지를 거듭 권고했다.
“우린 자가격리가 너무 좋거든요. 사람이란 게 믿을 게 못 된다고 하지만, 걱정 안하셔도 돼요. 의심되면 수시로 전화하세요.”
그리고 제주공항에서 받은 나의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문자로 통보됐다. 음성 판정이었다. 뒷집 이웃인 진할매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결과를 집요하게 물었다. 미궁의 알고리즘은 이것이었나. 앱을 통한 자기통제와 전화,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감시자가 도처에 있었다.
탕탕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붙박이가 되었다. 한국과 프랑스에서의 팬데믹 대처를 비교하는 논문 수준의 글을 써 내려갔다. 한국의 모든 상황에 적잖이 감동한 모양이었다. 한국은 땅덩어리가 작아서 통제하기 쉬운 거라는 해외의 허무맹랑한 논리에 적극 반박하는 글이었다.
나는 미로 같은 작은 집을 싸돌아다녔다. 몸이 모니터 앞에 앉길 극구 거부했다. 전화를 붙들고 지인과 오랜 시간 통화하고, 잡초를 뽑고, 장시간 부재로 흉해진 곳을 보수하고, 옷장과 서류함을 정리하며 육체노동에 매달렸다. 격리가 끝난 후 서울에서 만난 친구는 오래 여행하느라 얼굴이 많이 탔다고 했다. 모르는 소리, 이거 한국산이다. 제주의 우리 집 앞마당에서 전깃줄로 수 놓인 하늘을 바라보며 웃을 때 습격한 자외선의 결과였다.
해외에선 아직도 강제 격리가 진행되는 곳이 많은 모양이다. 슈퍼마켓에 갈 때조차 통행증을 끊어야 하고, 정책 당국에 의해 봉쇄된 마을 및 상점도 부지기수다. 이 같은 팬데믹 폭풍은 부부의 삶까지도 관여했다. 올 크리스마스에 베이비붐이 발생할 거란 전망이 있는가 하면 이혼이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외부 활동을 하던 남녀가 좁은 공간에서 종일 붙어 살 때 생기는 상반된 현상이다. 같은 상황에서 누구는 숨쉬고, 누구는 숨막힌다.
우리의 자가격리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했다. 손볼 거리가 많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거리와 밖거리로 나뉜 두 채의 집을 넘나들 수 있고, 바람 빠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그리해보고 싶었던 해안도로 주행을 마당에서 꿈꿨다. 행복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그러나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는 것은 ‘격리’란 단어 뒤에 숨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것이 ‘우울’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전환도 필요했다. 지금의 격리는 감옥이 아닌 예방의 과정이다.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건 위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격리가 끝나는 당일, 또 다른 낯선 번호가 떴다. 정신건강복지센터라고 소속을 밝힌 남성은 혹 불안이나 우울, 불면이 찾아오지 않았는지 물었다. 나의 밝은 대답을 들은 그는 오히려 내가 건네야 할 이야기를 했다. 닳도록 해도 빛나는 그 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묘했다. 고작 2주간의 격리였을 뿐인데 집 밖이 새삼 낯설었다. 타국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죽을 고비를 맞았던 여행자였음에도 그랬다. 진짜 나가도 되는 거야? 회환과 만감이 교차하는 새해라 여기자. 자정이 지나자마자 탕탕에게 동네 산책을 하자고 했다. 결심만 밥 먹듯 하는 우린 그냥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날 문 앞엔 배추 몇 포기가 툭 던져져 있었다. 뒷집 진할매의 자가격리 종료 축하 선물이었다.
“할매, 나랑 드라이브 한 번 할까?”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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