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둘의 나이로 얼떨결에 방송 작가가 됐던 청년이 41년만에 회원 수만 3800여명에 이르는 거대 단체를 이끌게 왰다.
지난달 12일 한국방송작가협회 제30대 이사장이 된 임기홍(63) 작가는 예능 작가들의 ‘대부’이자 ‘전설’로 꼽힌다.
그동안 손댔던 작품만 어림잡아 50여편, 1980년대 안방극장 최고의 히트작들이었던 ‘쇼비디오자키’ ‘일요일 일요일밤에’ ‘우정의 무대’ 등부터 현재 인기리에 방송중인 ‘불후의 명곡’까지 전 연령대에게 익숙한 예능 프로그램 대부분이 그의 펜과 컴퓨터 자판을 거쳤다.
후배들을 위해 방송 은퇴가 아닌 ‘조퇴’를 결심했다는 임 작가 아니 임 신임 이사장을 이달초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작가협회 사무실에서 만나, 산적한 현안과 예능 프로그램의 미래 등에 관해 폭넓은 대화를 나웠다.
▶ 달라진 방송 환경, 이렇게 바꿀 것이다!
앞으로 4년의 임기 동안 임 이사장이 발벗고 개선에 나설 핵심 현안은 회원들에게 2차 저작권을 찾아주는 것이다.
지상파와 케이블 위주였던 방송 플랫폼이 유튜브 등으로 다변화된 가운데 한 편의 프로그램이 가공과 재가공을 거치며 부가 수익을 올리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프로그램 탄생의 주역인 작가는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경우를 방지하자는 취지에서다.
임 이사장은 “조금씩 좋아지곤 있지만, 비(非) 드라마는 작가가 여전히 포맷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회원 권익 보호와 저작권 징수라는 협회의 설립 목적을 지켜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반드시 손봐야 할 문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밖에 표준계약서 작성의 완전한 도입도 추진할 계획이다. 앞서 표준계약서를 도입해 열악했던 노동 환경을 개선해가고 있는 영화계처럼, 시사다큐·예능·드라마·라디오·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협회 소속 작가 모두가 방송사와 외주 제작사 등 일부 ‘갑(甲)의 횡포’에 더 이상은 시달리지 않도록 제도 정착에 힘쓸 생각이다.
▶ 미래의 예능, 이렇게 달라지지 않을까?
코미디와 쇼버라이어티 등을 자유롭게 오가며 예능 프로그램의 트렌드를 주도해 온 임 이사장이지만, 다가올 유행을 점쳐달란 부탁엔 금세 신중 모드로 바뀌었다.
그는 “리얼 버라이어티와 ‘먹방’을 이을 새 트렌드를 두고 PD와 작가 등 많은 방송계 관계자들이 머리를 싸맨 채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며 “아마도 정보 버라이어티가 대세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먹방’도 일종의 정보 버라이어티”라면서 “방송사에 거는 시청자들의 기대가 갈수록 높아지고 까다로워지고 있다.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제공하지 못하면 유튜브 등에 밀려 입지는 상당히 좁아질 것”이라고 답했다.
이밖에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적합한 트렌드 개발도 후배 작가들이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 현업 복귀? 이제는 후배들에게 길을 내줘야
타고난 입담으로 한때 명 사회자를 꿈꿨다. 그러나 “네 생각을 글로 적어보라”고 권유한 PD의 한마디에 별 생각없이 작가로 길을 바꿨다.
어렵지 않게 작가가 되긴 했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실수도 잦았다. 뼈를 깎는 노력만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인쇄소에 사정사정해 미리 대본을 빼 돌린(?) 뒤, 일일이 필사해가며 선배들의 집필 노하우를 익혔다.
작가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고 나서부터는 선배들와 후배들을 잇는 가교 역할에도 충실했다. 이사장 취임전 이미 이사로 6년, 부회장으로 12년 등 모두 합쳐 20년 가까이 한국방송작가협회에 몸담았다.
적을 만들지 않는 원만한 성품까지 더해진 결과, 예능 작가로는 최초로 김수현 이금림 김운경 등 스타 방송 작가들이 독식해온 협회 수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급여요? 물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네요. 이사장이란 인간이 직원들에게 자기 월급이 얼마냐고 묻기가 조금 거시기하잖아요(웃음). 능력에 비해 정말로 운이 좋아 40년 넘게 방송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현업 복귀에 대한 욕심이 없는 이유랍니다. 많은 선후배들에게 받은 사랑과 도움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린다는 마음으로 임할 테니 많이 응원해 주십시요.”
조성준 기자 when914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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