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토마 피케티의 제언
“이제 사회주의 몰락이 가져온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평등 감소를 위한 이데올로기 전환을 시도해 볼 때가 됐습니다.”
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현지에서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상 간담회에서 토마 피케티(49) 파리경제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은 절대적으로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피케티 교수는 2013년 경제적 불평등 심화ㆍ확대 현상을 역사적ㆍ통계적으로 입증한 ‘21세기 자본’(글항아리)을 펴내고 일약 스타 경제학자로 부상했다. 지난해 피케티 교수는 복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문학동네)를 내놨다. 이 책은 코로나19사태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5월 한국에 번역, 소개됐다.
책은 ‘정치 논리로 경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귀에 못이 박히게 반복되는 논리를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경제는,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거라 주장하고 싶지만, 그것은 그 사회 지배 세력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면, 상상 이상으로 빨리 불평등이 고쳐진 사례가 많다는 주장이다.
피케티 교수가 보기에 불평등이 교정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거리를 점령한 시민들의 움직임, 정당이나 노동조합 같은 조직된 집단의 구체적 프로그램, 그리고 이들을 한데 묶는 이데올로기다. 이 가운데 핵심은 이데올로기 문제다.
피케티 교수는 ‘사회주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그는 “1990년대 공산주의 몰락 이후 이데올로기 문제를 건드릴 생각을 못하고 있다”며 “그 뒤 30년이 지나면서 불평등이 지나치게 커졌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위기이자 기회인 이유다. 피케티 교수는 “위기는 경제 문제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는 경우가 더러 있다”며 “코로나 이후 지나친 불평등을 감소시킬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이 가동될 수 있도록 하는 움직임에 시민들이 적극 가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좌파 정당은 선택의 기로에 내몰려 있다. 피케티 교수는 “코로나19 사태로 우파 정당마저 곤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극우 민족주의, 인종주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가 번질 수 있다”며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적 국제주의를 좌파 정당들이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낙관적이었다. 피케티 교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선동적이고 비합리적인 인물을 지지하지 않을 것 같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권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좌파의 상상력을 촉구하는 피케티 교수에게 최근 한국에서 진행 중인 기본소득 논의는 약소한 수준이다. 그는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그게 모든 복지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오인하게 만드는, 그 표현의 뉘앙스가 적절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피케티 교수는 ‘기본소득’ 대신 ‘최저소득’이라는 표현을 썼다. 최저 수준의 돈을 주는 걸 두고 대단한 복지인 양 굴지 말라는 힐책이기도 하다.
사실 피케티 교수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건 ‘기본자산’이다.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서 상속된 부가 없는 젊은이들이 25세에 이르면, 주거 마련이나 창업 종잣돈 등을 명분으로 유럽 기준 성인 평균 자산의 60%에 해당하는 12만유로(1억6,000만원가량)를 한꺼번에 주자는 것이다. 월 100만원 정도 주는 기본소득 따위가 무슨 대단한 복지인 양, 월 100만원 정도 주니까 다른 복지 제도는 없애도 되는 것인 양 굴지 말라는 건 그래서 하는 얘기다. 재원은 소득과 자산에 대한 강력한 누진과세로 마련하면 된다. 이게 가능한 얘기일까 싶은데, 피케티 교수는 “이런 식이 아니면 자산 집중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의 타파와도 연결돼 있다. 피케티 교수는 “교육의 질조차 부모의 소득과 자원에 좌우되는 현실을 감추며 자기 능력을 과장하는 이들은 기존 시스템의 승자들”이라며 “능력은 개인의 성공을 결정하는 수많은 프로세스 중 하나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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