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44년 음반 외길 부산 ‘아이러브뮤직’
부산 지하철 1호선 자갈치역 7번 출구에서 20m 정도 남포역 방향으로 걷다 보면 상가건물 쪽으로 ‘아이러브뮤직’(대표 황성곤ㆍ부산 중구 남포동5가 37의 4))이란 간판이 보인다.
부산 전역에 3~4개의 레코드점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LP, CD, DVD 등 음반관련 모든 제품을 복합적으로 취급하는 곳은 이곳뿐이며, 소매점으로는 전국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이곳은 과거 부산에서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와 아티스트를 꿈꾸는 사람들의 성지였다. 오프라인 매장의 퇴조와 함께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뜸해졌지만 최근엔 K팝을 알리는 한류전도사 역할에다 추억을 되살리고 싶은 장년층의 감성을 소환하는 곳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이러브뮤직’은 1977년 11월 부산 서구 충무동에서 ‘중앙레코드’란 이름으로 출발했다. 20대에 창업한 황성곤(64) 대표는 도중에 가게 이름을 한번 바꿨을 뿐 44년간 외길을 걸었다. 1960, 70년대 유명 작곡가 황우루(작고)가 그의 5촌 당숙이며, 숙모는 가수였다. 그런 인연이 일찍 음반가게에 눈을 돌린 계기가 됐다.
고속성장 시대였던 70년대 후반은 무얼 하던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사는 시절이었다. 야외용 전축이 막 나와 LP가 확산되고, 1979년 소니의 ‘워크맨’ 등장으로 카세트테이프의 소비가 크게 늘던 시절이었다. 카세트플레이어의 보급은 음악의 생산과 유통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음악의 대중화는 그 결과다.
5평 남짓한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욕심을 내 1988년 인근 지하철 개통과 함께 생긴 지하상가에 10평짜리의 또 다른 가게를 냈고, 경남 진해시에 지점을 내기도 했다.
1990년대는 레코드가게의 전성기였다. 부산에만 480여개의 레코드가게가 있었고, 남포동과 서면 등 도심 번화가에는 불법복제 음반을 파는 리어카들이 넘쳐났다. 가수들이 신곡을 발표하면 리어카 비품(불법복제) 제작업자에게 먼저 달려가 자신의 노래를 1번으로 올려달라고 부탁하던 시절이었다. 대중음악의 성공 포인트는 자주 듣다 익숙해지는 ‘중독성’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그는 상호를 ‘아이러브뮤직’으로 바꾸고 가게를 50평으로 키우게 된다. SKC 등 대기업과 신나라레코드 등 음반사들이 부산에 100평이 훨씬 넘는 대형 매장을 앞다퉈 내자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덩치를 키우자마자 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잘나가던 음반산업이 하루아침에 사양산업이 돼버린 것이다. mp3의 등장 때문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디지털기기 하나에 수 천곡의 음악을 담을 수 있는 편의성은 음반시장의 패러다임을 확 바꿔버렸다. 뒤이은 mp3 음악 공유 프로그램 ‘소리바다’의 등장은 산업 생태계를 일시에 파괴했다. 소비자들은 매장을 찾던 발걸음을 다운로드로 바로 대체했다. 수익모델이 무너진 음반산업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8,000개가 넘던 전국의 레코드가게는 죄다 문을 닫아 현재 고작 300개도 안 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유통구조도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창작물에 대해 반품 없는 선주문이 관행화됐기 때문이다. 그의 창고엔 수요 예측에 실패해 먼지가 쌓인 음반이 적지 않다. 20% 이하인 소매 마진도 매력적인 장사가 아니었다.
황 대표는 “1990년대 전국음반소매상연합회 등의 권역별 지부장을 맡았던 사람 가운데 현재 저와 광주지부장 두 사람만 가게를 유지하고 있다”면서 “인근 권역에서 지부장을 지낸 한 분은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고, 전국 회장까지 지낸 분은 부동산중개업으로 전직하는 등 대부분 업계를 떠났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에 따라 인구 50만 이하 도시의 경우 현재 레코드가게가 아예 없는 경우가 적지 않고, 있더라도 별 구색없이 CD나 LP만 파는 가게가 대부분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나름의 생존방식은 희소성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교보문고 등이 그나마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인데, 구색은 말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온라인 판매가 대세인 상황에서 이익을 남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LP, CD, DVD, 블루레이 등 다양한 재생기기용 제품을 망라하고 ‘뽕짝’과 가요, 팝, 클래식, 재즈, 뉴에이지, 월드뮤직 등 세분화된 음악장르를 제대로 갖춘 곳은 국내에선 자신의 가게 밖에 없다는 게 황 대표의 자부심이다.
황 대표는 “욕심이 과한 측면이 있었다. 돈을 버는 족족 구색을 맞추는데 재투자했다”면서 “금액으로 치면 매입가격으로 약 4억원어치가 넘는 제품을 갖고 있는데 LP는 5,000장, CD는 최소 몇 만장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가게를 찾는 대부분의 고객은 온라인 구매에 익숙지 않은 장년층이다. 그는 ‘아이러브뮤직’으로 상호를 바꾼 것에 대해 내심 후회하는 눈치였다. 황 대표는 “2002년 매장을 확장 오픈하면서 시대변화에 맞게 감각적인 상호로 변경한 것인데, 기대했던 젊은층은 다 떨어져나가고 추억을 찾는 장년층이 주 고객이 됐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새로 찾은 활로는 외국인이다. ‘아이러브뮤직’은 서울 명동의 몇몇 음반가게들과 마찬가지로 부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 방문코스다. 그들은 K팝의 본고장 한국 현지에서 유명 아이돌의 최신 CD 하나쯤을 사가는걸 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일본, 중국 관광객이 주류를 이뤘다면 요즘은 동남아와 중동 관광객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황 대표는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음원을 사지 음반은 사지 않는다”면서 “국내 제작 음반 물량의 90%는 외국인이 소화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서울, 부산 등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도시의 음반소매상들은 K팝 보급의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진흥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차별적이라는 시각도 갖고 있었다. 그는 1980년대부터 음반에 대한 부가가치세 면제 운동을 벌여왔다. 현재 책(도서)은 비과세인 반면 음반에 대해선 과세를 하고 있다. K팝 보급의 일등공신인 음반업이 되레 찬밥 신세인 셈이다.
40년 넘게 온종일 음악만 들어온 그에게 애착 가는 음반을 물었더니 “콕 집을 수는 없지만 팝은 샘 브라운의 ‘STOP’, 클래식은 베토벤의 ‘합창’과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을 자주 듣는 편이며, 대중가요는 일반인이 가진 그 시절의 중독성을 함께 즐겨온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기억에 남는 고객으로 50대에 세상을 뜬 한 단골을 떠올렸다. 이 고객은 신작은 거의 다 사가는 음반수집광이었다. 그는 음반을 사자마자 꼭 가게에서 겉 포장 비닐을 뜯어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그는 너무 과한 음반수집 때문에 아내와 자주 마찰을 빚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포장만 뜯은 새 음반을 들고 가서는 매번 “여보 친구에게 며칠 빌렸어”하고 둘러댔다고 한다.
황 대표는 40여년을 지켰던 오전 10시 출근ㆍ오후 10시 퇴근 스케줄을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1시간 당겨 오후 9시 퇴근하며 1시간의 꿀 같은 여유를 즐기고 있다. 다만 코로나19로 외국인 관광객이 끊기면서 잔뜩 선주문한 방탄소년단 CD에 먼지가 쌓여가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해 ‘음반으로 고객 감동을 제공한다’는 경영철학을 가진 ‘아이러브뮤직’을 부산의 ‘백년가게’로 선정하며 100년 이상 존속ㆍ성장을 기대했다.
황 대표는 “어려운 시장 환경이지만 재고 등 가게 사정을 살펴보면 사업을 접을 기회를 놓친 것 같다”면서 “물려받을 수 있을 정도 나이의 아이들이 있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글ㆍ사진 목상균 기자 sgm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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