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사실주의 회화의 문을 연 귀스타브 쿠르베의 생애가 가장 빛나던 순간은 파리코뮌의 예술위원장이 된 때가 아니라 사임한 때였다. 프랑스 제2제정의 ‘반동적’ 조치에 맞서 노동자ㆍ인민의 권리를 일관되게 옹호했고, 제정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공허한 이상에 맞서 ‘사실주의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예술’이라며 진솔한 서민적 일상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던 그 혁명적 화가는, 자신이 주체로 참여해 이룬 이념의 구현체였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의 광장에서 스스로 등을 돌렸다. 코뮌 지도부와 군중들의 여러 과격한 행위들이 끼친 환멸, 자신이 한없이 경멸했던 ‘어용’이라는 영역에 다가선 예술가의 부자유에 소스라친 까닭이었다. 그는 1848년 혁명서부터 사회 참여를 마다하지 않던 신념의 투사이자 정치적 급진주의자였지만, 무엇보다 예술가였고, 코뮌의 다급한 권력 안에서 그림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미학적 알레고리를 결코 구현할 수는 없었다.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1830년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를 경멸했다. 모티브가 된 7월혁명은 루이 필립이라는 국왕을 옹립한 입헌군주정일 뿐이었고, 그 혁명을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의 여신이 주도한 것도 아니어서였다. 그는 진실을 가린 ‘상징’을 혐오했고, 상징이 덮은 사실의 혁명성에 주목했다.
코뮌의 바리케이드도 너무 직설적이어서 못마땅한 소재였다. 오히려 장지(葬地)에 둘러선 성직자와 서민들의 대비(‘오르낭의 매장’ 1849~50), ‘화가의 작업실’(1854~55)이라는 한 공간에 모인 귀족과 서민들의 간극이 그의 소재였다. 그는 깃발과 철조망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들이 입은 옷과 표정과 태도에서, 차별의 현실을 제시하고 분노의 근거를 찾았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발표한 그림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는 시종을 대동한 한 귀족(후원자)이 화구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른 화가(쿠르베)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는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富)’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귀족을 사이에 두고 살짝 고개를 숙인 왼편의 시종과 한껏 고개를 추켜 든 자신(예술)의 당당함을 대비시키는 거였을지 모른다. 정치적 급진주의자로서 그는 저 둘의 간극을 메우고자 했고, 화가로서 그는 그 당위를 메타포로 드러내고자 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