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지다, 한국인의 탐닉] <1> 커피
모카포트ㆍ더치 메이커 등 5개 구비 “내 취향 좀더 다양하게 즐기려”
깐깐해진 한국인 입맛에 블루보틀 등 스페셜티 커피 시장 빠른 성장
“더치커피는 차갑게 추출하기 때문에 향이 오래가고, 모카포트는 물과 원두를 1대 1 비율로 맞추니 커피 맛이 진한 게 특징입니다.”
주부 이예원(40)씨는 자칭 ‘커피 마니아’다. 그녀의 집 안에 들어서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주방에는 각종 커피 메이커를 들여놨고, 각기 다른 맛의 원두를 구비해 커피의 맛과 풍미를 즐긴다. 그래서 가족들과 친구들이 부르는 그녀의 별명 역시 ‘커피녀’다. 커피에 대해선 해박하다 못해 전문가 수준이다.
그녀가 커피에 빠진 건 10여년 전.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면서 커피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다고. 더 맛있는 커피를 찾게 됐고 직접 제조해서 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 원두의 분쇄 정도와 추출 방식에 따라, 또한 사람의 손맛에 따라 달라지는 커피의 예민함이 신기했다. 이씨는 현재 캡슐커피와 모카포트, 더치커피, 드립커피 등 무려 5가지 커피 메이커를 두고 있다. 며칠 전까지 가지고 있던 에스프레소 커피머신은 얼마 전 중고품 온라인몰에 팔았단다. 최신 커피기계를 들여놓기 위해서다.
요새는 바로 뽑아 마실 수 있는 캡슐커피를 주로 마신다. 편리해서다. 여유 있게 커피를 즐기고 싶을 땐 모카포트나 더치커피 메이커를 꺼낸다. 모카포트는 뜨거운 물의 증기로, 더치커피는 차가운 물로 커피를 추출한다. 5분여 만에 진한 맛의 커피를 낼 수 있는 모카포트와 달리 더치커피는 차가운 물, 얼음으로 추출하기 때문에 적어도 3시간 이상은 걸린다. 그녀는 여러 방식으로 커피를 즐기는 이유에 대해 “커피는 생활의 일부이며,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자 놀이”라며 “좀더 다양한 방식으로 내 취향을 즐기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커피 맛’을 따라다니는 사람들
‘금일 재료 소진으로 조기 영업종료 합니다.’ 지난달 초 지하철 4호선 사당역 인근에 있는 한 커피집이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방배동에서 ‘맛집’으로 꼽히는 커피숍 ‘태양커피’가 방배 2호점을 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곳은 지역 주민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개점 날짜까지 예상해가며 꽤나 기다려온 지점이다. 태양커피는 에스프레소 위에 크림을 얹어 만드는 ‘아인슈페너’ 커피 ‘맛집’이다. 이 집만의 강점은 3가지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에스프레소+물+크림’, ‘에스프레소+우유+크림’, ‘콜드브루+크림’ 등 개인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가격도 4,500원으로 착한 편이다. 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선 5,600원이니 말이다.
맛과 가격을 동시에 충족하니 방배동에선 “태양커피 모르면 간첩”이란 말까지 나온다. 그래서 방배 1호점은 정해진 영업 종료시간(오후 9시)보다 일찍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료가 빨리 소진되기 때문이다. 새로 개점한 방배 2호점도 재료 소진으로 조기 영업종료를 하는 날이 많았고, 1인당 2잔 이하로 주문까지 제한했다. 태양커피를 단골집처럼 드나든다는 직장인 이모(35)씨는 “커피의 산미(酸味)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추천”한다며 “가격 할인을 해도 맛이 보장되지 않으면 줄을 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커피 ‘손맛’을 따라다니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현모(38)씨는 동네 단골 카페에서 향이 깊고 산미가 풍부한, 6,000원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를 즐기곤 한다. 단 조건이 있다. 그 집 주인이 제조해 주는 커피만 마신다. 주인이 없을 때 그냥 나온 적도 있다. 현씨는 “한번은 주인이 화장실에 갔다고 해서 기다린 적도 있다. 이제는 그가 있는 시간을 파악해 갈 정도”라고 했다. 핸드드립 커피의 특성상 커피를 제조하는 사람의 기술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가의 커피라도 맛을 추구하는 이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지난해 성수동 1호점을 시작으로 한국시장에 진출한 ‘블루보틀’은 라테 가격이 6,000원대로 비싼 편이다. 한 가지 원두만으로 제조한 ‘싱글 오리진’을 선택하면 7,000원대로 뛴다. 주문과 동시에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만들기 때문에 ‘슬로 커피’로 유명하다. 순전히 맛을 중시한 과정이다. 블루보틀 역삼점에서 만난 한모씨는 “근처가 회사라서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들르는 곳”이라며 “점심 이후에 주문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지만 맛있는 라테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인들의 커피 입맛이 점점 까다로워지면서 ‘스페셜티 커피’ 시장도 성장하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는 미국의 스페셜티커피협회(SCA)가 원두 재배 환경, 풍미 등 엄격히 정한 기준에 따라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받은 커피를 말한다. ‘스타벅스 리저브 바’ ‘블루보틀’ 등이 대표적이다. 스타벅스만 해도 중국 다음으로 국내에 50여개의 ‘리저브 바’ 매장을 두고 있는데, 이는 주요국 인구 1,000만명당 10개 정도로 가장 많은 수준이라고 한다.
◇카페, 공간을 내어주다…사랑방, 공부방, 의류매장으로
직장인 임모(33)씨는 평일 퇴근 후에 동네 커피전문점을 찾는 게 ‘루틴’이다. 그는 커피숍에 머무는 두 시간가량은 업무와 배제된 “나만의 시간이자 공간”이라고 말한다. 임씨는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도 쓴다. 작가 지망생은 아니지만 소설이나 시를 쓰는 취미가 생겼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 카페는 임씨에게 문화생활 공간으로 바뀌었다.
1970~80년대 커피는 다방에서나 접하는 음료였다. 1999년 스타벅스가 이대점 1호점을 내면서 커피의 의미도 달라졌다. 커피를 매개로 한 ‘공간문화’가 살아났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행위만 존재하는 게 아닌, 모임을 갖고 담소를 나누거나, 혹은 혼자 책을 읽고 노트북과 휴대폰을 이용하는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카페에서 오랜 시간 공부하는 ‘카공족’ 논란이 커피전문점을 둘러싼 또 다른 이슈가 되었다.
커피는 이제 공간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서울 강남역에 자리 잡은 커피숍들은 인접한 외국어학원 수강생들이 몰리면서 외국어로 토론하는 공간이 됐고, 대치동과 평촌 학원가의 커피전문점들은 학생들의 공부방이자 학부모들의 대기 장소가 된 지 오래다. 1980~1990년대 동네 미용실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주부들의 ‘사랑방’도 카페로 옮겨졌다. 경기 안산에 사는 주부 박모(45)씨는 “아파트 상가 안 자그마한 커피숍은 엄마들의 쉼터이자 정보 교류의 장”이라고 말한다.
커피전문점들이 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장소로 탈바꿈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커피를 둘러싸고 생활문화 공간이 형성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벗고 찾아와 머물 수 있도록 진화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개성 있는 인테리어로 꾸며진 카페나 아기자기한 예쁜 찻잔들이 세팅된 커피숍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며 일명 ‘커피 맛집’으로 소개된다.
사람을 모으는 카페의 이런 위력은 사실 패션업계가 먼저 알아봤다. 일명 ‘주객전도’ 마케팅. 지난해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개점한 패션브랜드 ‘준지’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카페 ‘펠트커피’를 입점시켰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예쁜 카페로 이름난 펠트커피의 유명세로 모객에 힘을 주고자 했다. 결과는 대성공. 10여평의 작은 규모지만 하루에 수백 명의 방문객들이 다녀간다. 지난달 총 3층 규모로 코엑스몰에 개점한 패션브랜드 ‘스파오’도 들어오는 입구에 ‘스파오프렌즈’ 카페를 마련했다. 지역 특성상 직장인들의 발길을 잡기 위한 것. 커피를 매개로 한 패션업체들의 ‘윈윈’ 전략이 유행이다.
라선아 방송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커피 맛을 탐닉하면서 전문화되고 질적 소비를 하길 원한다”며 “커피 맛 이외에 카페 분위기 등 공간이 중시되면서 선택의 기준이 바뀌게 되는데, 이는 소비활동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달고나ㆍ김희애 커피’를 아시나요
“뭔 커피를 400번이나 저어요? 염병, 내가 알기로 커피는 사먹는 게 최고야!” 130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박막례(75) 할머니도 지난 3월 ‘달고나커피’를 만들며 진땀을 뺐다. 올 초 KBS의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달고나커피는 SNS와 유튜브를 타고 급속도로 퍼졌다. 특히 국내 유명 유튜버들의 ‘400번 젓기’ 레시피는 전 세계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고, 뉴욕타임스까지 나서서 달고나커피를 보도했다. 달고나커피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집콕족’들에게 즐거운 놀이문화로 소비되며 유명세를 탔다.
배우 김희애가 우아하게 마시는 커피도 대한민국을 달궜다. 최고 시청률 28.4%(닐슨코리아)를 찍은 JTBC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에서 캡슐커피를 내려먹는 모습이었다. 온라인에서는 ‘김희애가 마신 커피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쏟아졌고, ‘네스프레소 버츄오 플러스’ 제품은 ‘김희애 커피’로 불리며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블로그, SNS를 타고 정보가 공유됐다. 오죽하면 “김희애를 보고 캡슐커피 머신을 해외직구 했다”며 상세한 ‘직구’ 후기를 올린 이들도 있다. 유명인들의 커피 소비에서 대리만족을 얻는 걸 넘어, 직접 소비를 통해 자아의 만족감을 실현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그만큼 커피는 한국사회와 맞닿아 있다. 편의점에서도 캡슐커피를 판매한다. GS25는 지난 3월부터 스타벅스 캡슐커피를 판매했는데, 출시 3개월 만에 매출이 65%이상 신장했다. 가까운 편의점을 이용해 트렌디하고 실용적인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거다. 온라인몰 SSG닷컴도 지난 1~5월 캡슐커피 머신 매출이 작년 동기 대비 35% 증가했고, 에스프레소 머신 등 커피 가전 매출도 같은 기간 65%나 뛰어올랐다. SSG닷컴에 따르면 20만~30만원대 캡슐커피 머신과 50만~60만원대 프리미엄 전자동 커피머신의 판매가 두드러졌다. 이 때문에 국내 커피산업의 전망은 무척이나 밝다. 업계는 2018년 7조원대 시장 규모가 2023년에는 9조원대으로 확대될 것이라 전망한다. 커피전문점의 매장 수는 더 증가하고, ‘홈카페’ 관련 제품도 매출 상승이 뚜렷해졌다.
홍규태 제일기획 팀장은 “한국에서 커피문화는 마시는 행위 자체보다 숨겨진 맛집이나 특별한 원두를 찾는, 남들과 차별화하는 즐거움을 얻는 쪽으로 번성하고 있다”며 “정보 공유 속도가 상당히 빨라 나에게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는 ‘배지벡터’ 문화로 확산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이혜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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