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초 좋은 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토요일 아침 아이 축구 시합이 있어 따스한 봄 햇살 아래서 다른 부모들과 잡담을 나누며 푸른 잔디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100일이 채 안 되었을 때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 당선에 실망하고 있었지만 (내가 사는 매디슨은 70% 이상 클린턴에게 투표했다) 그 오월 아침 미국 백인 중산층들의 삶은 평화롭고 편안하기만 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사회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진단을 내놓았지만, 이런 현상이 한 가지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불만과 위협받는 백인의 지위 때문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저학력 백인 노동자 들을 트럼프 현상의 얼굴로 흔히 떠올리지만, 콘크리트같은 43% 지지율은 대졸 고소득층 백인 다수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실 언제나 선거에서 투표하고 거액의 정치 기부금을 내는 여론 주도층인 그들이 실질적인 트럼프주의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고 봉사활동에 활발한 ‘좋은 시민‘인 이들의 상당수는 적어도 겉으로는 트럼프의 인종주의와 반여성주의를 비판하거나 불편해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럼프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혹은 바꾸지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지난 3년간 이들의 세금은 낮아졌고, 집값은 올라갔고, 전례 없는 주식시장 호황으로 은퇴 연금은 두둑해졌다. 이들에게 트럼프의 비도덕성은 낮은 세금과 커지는 부를 위해 치를 만한 대가였고, 풍족하고 평화로운 교외 주택가의 일상에서 그가 일으키는 혼란은 멀리서 들리는 소음이었다.
지난 오월의 마지막 주말, 이번엔 좋은 초여름날이었다. 햇살은 좀 따갑지만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이 상쾌한 토요일, 가족과 근처 수목원에 긴 산책을 갔다. 코로나19 때문에 홈스쿨링과 재택근무를 하지만 인구밀도가 높지 않고 공원과 녹지가 많은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이 산책과 운동으로 답답함을 달랜다. 산책길에는 들꽃이 지천이고 수목원에는 신록이 짙어가고 있었다. 이웃 미네소타에서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고 전국 곳곳에서 전쟁터에나 어울릴 장갑차로 중무장한 경찰이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아대고 이를 보도하는 기자들의 카메라에 곤봉을 휘둘러 대던 주말이었다. 불과 10분 남짓 떨어진 주청사 앞에서도 밤새 시위가 있었지만, 미국 백인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이 동네의 일상은 여전히 평화롭고 편안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였다. 하지만 잔잔한 수면 밑으로 미국 백인 중산층 사회의 깊어가는 불안감을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코로나19,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그리고 전국으로 번진 시위는 그들의 번영과 평화로운 일상이 얼마나 취약하고 정의롭지 못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불안감에 미국 백인 중산층, 특히 중도와 온건 보수파 백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주목해 볼 일이다. 군대를 동원해서 거리를 점령하겠다며 시위대에 선전포고를 한 트럼프는 그들이 결국 법과 질서라는 명분으로 자기를 선택할 것이라는 도박을 하는 것 같다. 그가 맞는다면 이번 선거도 예측 불가능한 접전이 될 것이다.
정치학자 레비스키와 지블랏은 대부분의 민주주의는 군인의 총성이 아니라 선거로 뽑힌 지도자에 의해 서서히 죽어 간다고 경고한다. 푸른 잔디밭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는 아이들의 함성, 아름다운 수목원 신록 사이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이게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소리일까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 오래된 민주주의는 시작부터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취약한 민주주의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민주주의가 또 어디 있을까?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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